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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지옥으로 위로받는 나의 지옥[이재국의 우당탕탕]〈89〉

입력 | 2024-02-01 23:30:00


요즘 TV에서 인기 있는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죄다 연애 리얼리티와 남의 가족사, 남의 육아일기를 관찰하는 프로그램이다. 솔로들이 나와서 어떻게 연애하는지, 또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의 심리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거절하는 심리를 훔쳐보며 즐거움을 느낀다. 현재 나의 애인과 함께 출연해 다른 사람으로 환승하는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연애 프로그램을 보며 대리 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순수한 연애 프로그램은 이제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른 연애 프로그램들이 매운맛이 돼버렸다. 오죽하면 ‘솔로지옥’이라는 프로그램은 커플이 되면 천국도에 갈 수 있고 솔로로 남으면 지옥도에 남아 있어야 하는 설정까지 제시한다. 그야말로 솔로지옥, 커플천국이 현실이 돼버렸다.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커플이 되면 진짜 천국도에 갈 수 있는 걸까? 한동안 연예인들이 가상 결혼 생활을 하거나, 결혼을 전제로 일반인과 맞선을 보는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었다. 연예인들의 심쿵하는 결혼 생활을 보여주는 ‘동상이몽―너는 내 운명’ 같은 프로그램도 있다. 그런데 요즘 시청자들은 ‘동상이몽―너는 내 운명’처럼 달달한 연예인들의 결혼 생활을 별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혼해서 살아보니 신혼 때나 달달할 뿐, 결혼 생활이라는 게 전체적으로 달달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동상이몽’보다는 ‘결혼지옥’을 더 좋아한다. ‘어떻게 저런 남편이 있지?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내 남편도 얄밉지만 저 남자는 진짜 별로다’, 아니면 ‘어떻게 저런 아내랑 살고 있지? 내 아내도 얄밉지만 그래도 저 여자보다는 낫다’. 그렇게 남의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을 보면서 거기서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동상이몽’ 볼 때는 나도 저런 이벤트 받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소외감이 느껴지고 괜히 내 결혼 생활이 초라하게 느껴지지만 ‘결혼지옥’을 보고 나면 ‘그나마 우리 집은 덜 뜨거운 지옥이구나! 저 사람보다는 그래도 나랑 같이 사는 사람이 열 배는 낫다’고 생각하며 위안 삼게 되는 것 같다.

솔로도 지옥, 결혼도 지옥, 그렇다면 혹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면 인생이 좀 나아질까? 한때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전 국민이 사랑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연예인 자녀들의 귀여움을 보면서 힐링했고 그때 나왔던 아기들은 모두가 국민 조카에 국민 손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귀여운 육아 프로그램이 아니라 육아의 어려움을 보여주거나 상담을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아이가 주는 행복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지만 현실 육아가 힘든 건 사실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자란 요즘 아이들은 왜 울고, 왜 화를 내고, 왜 짜증을 내고, 왜 이상한 행동을 하는지, 전문가가 아닌 이상 치료하기도 힘들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힘든 육아, 때로는 지옥 같은 육아를 보면서 위안을 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게 현실이다.

솔로도 지옥, 결혼도 지옥, 육아도 지옥이라니. 우리는 어쩌다가 지옥 유니버스에 빠졌을까. 지옥이란 곳은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정말 단 1초도 상상하기 싫은 곳인데 현실에서는 지옥이라는 지뢰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마음이 삭막해서 오늘 점심은 김밥천국이라도 가야겠다.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