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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말라” 전세 사기 피해 청년들 울린 판사의 위로

입력 | 2024-01-24 16:35:00

뉴스1


부산 지역에서 사회초년생들을 상대로 180억 원대 전세 사기를 벌인 50대 여성이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았다.

24일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1단독(부장판사 박주영)은 사기 혐의로 기소된 50대 여성 A 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검찰이 구형한 징역 13년보다 높은 형을 선고하며 A 씨를 엄벌에 처했다.

A 씨는 2020년부터 3년간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부산 수영구 오피스텔 등 9개 건물에서 임대 사업을 하며 229명에게 전세보증금 180억 원을 받은 뒤 돌려주지 않은 혐의를 받는다.

박 판사는 “전세 사기 범행은 주택시장의 건전한 거래 질서를 교란하고, 서민들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임대차 보증금을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삼아 그들의 생활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중대 범죄”라며 “이런 범죄에 맞서 사법 당국은 단호한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피고인은 다른 부동산이 있어 변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유보된 약속은 또 다른 기망일 뿐”이라며 “공판 과정 내내 사죄하고 반성한다고 말했으나 피해자들이 항상 지적하듯 사죄와 용서는 법원에 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박 판사는 “원룸 임대 사업의 경위 등으로 볼 때 처음부터 불법성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은 유리한 정상”이라면서도 “피해자들이 수사를 의뢰하자 자신이 실형을 살게 되면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고 압박하고,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용서를 구한 바가 없다. 현실적인 피해 회복이 없는 이상 유리한 양형 요소도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은 이 사건 범행으로 인한 재산상 손해와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며 엄벌을 거듭 탄원하고 있어 중형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A 씨는 부동산 정책 변화로 인한 각종 규제·금리 인상 등으로 보증금을 반환하지 못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 판사는 “부동산 경기나 이자율 등 경제 사정은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고 변동할 수 있어 임대인은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고 대비해야 한다”며 “이 사건의 주된 책임은 자기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임대 사업을 벌인 피고인에게 있다”고 질책했다.

박 판사는 이날 20~30대 피해자들의 탄원서를 법정에서 하나하나 읽으며 피해자들을 위로하려 했다. 그는 선고가 끝난 뒤 피해자들에게 미리 써온 ‘당부의 말씀’을 읽어주기도 했다.

박 판사는 “험난한 세상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기성세대로서 비통한 심정으로 여러분의 사연을 읽고 또 읽었다”며 “기록과 탄원서에서 읽은 바에 의하면 여러분은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지극히 평범하고 아름다운 청년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절대로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말라”며 “한 개인의 욕망과 탐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과 같은 선량한 피해자를 만든 것이지 여러분이 결코 무언가 부족해서 이런 피해를 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 달라”고 다독였다. 박 판사의 위로에 일부 피해자들은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