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한 야외경기장 무대에 16세 청소년 2명이 나란히 섰다. 이내 이들의 양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12년 노동교화형이 선고된 직후였다. 한국 드라마를 본 게 죄목이었다. 무대 뒤로 교복 차림의 학생 수백 명이 도열해 이 공개재판을 지켜봤다. 영국 BBC방송이 18일 탈북자 단체로부터 제공받아 보도한 영상 속 모습이다. 북한이 이념 교육용으로 2022년 제작한 이 영상에는 ‘썩은 꼭두각시 정권의 문화가 10대들에게 퍼졌다. 고작 16살인 이들은 스스로 미래를 망쳤다’는 내레이션이 흘렀다.
▷북한은 2020년 말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이란 무시무시한 법을 공포했다. 남한 영상물을 보거나 소지한 경우 5년 형이던 처벌을 15년 형으로 강화했다. 유포한 자는 사형이다. 미성년자도 예외가 아니다. “미드 보다 걸리면 뇌물을 주고 나올 수 있지만 한국 드라마 보다 걸리면 총살”이란 말이 탈북자들 사이에서 돌았다.
▷북한은 MZ세대가 K콘텐츠에 젖어드는 현 상황을 특히 경계한다. MZ세대가 기성 질서에 도전적인 건 북한이라고 다르지 않다. 이들은 ‘당이 있어 먹고 산다’는 부채의식으로부터 자유롭다. 장기간 기근 속에 성장해 김씨 백두혈통의 은덕이랄 것을 별로 누린 적이 없다. 생활용품은 상당수가 중국 암시장에서 온 것들이다. 거기에 섞여 들어온 남한 영상물을 보고 자라 선전선동이 쉽게 먹혀들지 않는다. 이들은 연인을 부를 때 ‘동지’ 대신 ‘오빠’ ‘자기’ ‘남친’ 같은 애칭도 곧잘 쓴다. 북한이 이런 남한 말투를 ‘핀셋 단속’ 하겠다고 나선 것도 오죽 불안하면 그럴까 싶다.
▷“한국 드라마는 어려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약”이라고 탈북자들은 전한다. 큰 희망을 갖긴 어려워도 소소한 재미와 세상에 대한 호기심만은 포기할 수 없는 북한 젊은이들에게 K콘텐츠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이런 기본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한 처벌을 아무리 세게 해도 효과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날로 무자비해지는 북한의 내부 단속은 남한의 ‘문화 침공’이 그만큼 두렵다는 자백이나 다름없다. 미국의 한 싱크탱크는 북한이 미사일을 쏠 때마다 ‘오징어게임’이나 BTS 뮤직비디오가 담긴 USB를 평양으로 날려 보내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당장 실현 가능성은 낮지만 북의 도발에 대한 응징 효과만은 확실해 보인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