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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밭에서 출발한 과학적 열정[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입력 | 2023-10-19 23:36:00


이기진 교수 그림

연구실 위층, 생명공학과 이모 교수의 제자가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위해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로 떠나 3년 연구원 비자를 받았다고 한다. 독일의 막스플랑크 연구소는 노벨상 수상자를 최다 배출한 세계적인 과학 연구소다. 제주도 출신의 여성 박사가 이제 세계 최고의 연구소에서 석학들과 함께 연구하게 된 것이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제주도에서 당근 농사를 짓는 부모님께 독일에 공부하러 간다고 이야기했더니 되돌아오는 말이 “꼭 가야 하니?”였다고 한다. 오전 3시에 실험이 끝나서, 연구소에서 30분 거리의 독일 숙소까지 가기 위해 중고 자전거를 사서 타다가 망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짠한 생각과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 같은 서사와 열정의 힘으로 과학자로서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30년 전 내가 박사후연구원이었던 시절이 생각난다. 나는 박사후 과정을 밟기 위해 5곳의 외국 대학 지도교수에게 타자기로 쓴 장문의 편지와 이력서를 보냈다. 당시는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이라 복사한 논문들을 두툼한 항공우편으로 보냈다. 더 많은 곳에 보내고 싶었지만, 시간강사로 생활을 꾸려야 했던 터라 항공우편 요금이 상당히 부담됐다. 이력서를 보내면서 가장 빨리 답장이 오는 곳으로 간다는 원칙을 정했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가장 빨리 내게 연락해 준 지도교수와 10년 동안 함께 연구했다. 나의 30대는 지도교수의 배려로 어려움 없이 오롯이 연구에만 몰입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퇴근해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는 다시 학교 연구실로 자전거를 타고 가서 밤을 새우며 실험하다가 동이 트는 새벽에 퇴근했다. 이 시기 다행히 아이들도 평화롭게 잘 자라 주었다. 지금까지도 지도교수가 보여준 선의와 친절을 잊지 못한다.

올해는 2명의 여성 과학자가 노벨상을 수상했다. 보수적 노벨상의 천장을 뚫은 두 여성 과학자는 생리의학상을 받은 헝가리 출신의 커리코 커털린 박사와 물리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안 륄리에 박사다.

특히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커리코 박사의 삶이 흥미로웠다. 1955년 헝가리에서 태어나 일평생 mRNA를 연구했다. 스물아홉 살 때 헝가리 정부의 연구비가 중단되자 헝가리에서는 더 이상 mRNA 연구를 계속할 수 없었다. 오직 연구를 하기 위해 커리코 박사는 미국 필라델피아 템플대 박사후연구원 자리가 나자 그곳으로 향했다. 헝가리에서는 100달러 이상 반출할 수가 없어 딸의 곰 인형 속에 전 재산 1000달러를 숨겨서 떠났다. 그후 그녀의 삶은 여러 대학을 옮겨 다니는 비정규직 연구원이었고, 마흔 살이 되던 해에는 암 진단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mRNA 연구를 지속했다. 그런 30여 년간의 mRNA 연구가 빛을 본 것이다.

토요일까지 일했던 생명공학과 개구리 이 교수가 며칠 전 ‘토요일은 이제 좀 쉬어야지’ 하면서 떠나간 제자에 대한 아쉬움에 허공을 바라본다. 제주도 당근밭에서 출발한 과학적 열정이 국경을 넘어 어디까지 갈지 지켜보고 싶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