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의 날] 쌀 개발 앞장서며 국내 농업 이끈 농촌진흥청 한국전쟁 직후 양곡 수입에 의존… ‘통일벼’ 개발 1975년 첫 주곡자급 경제 수준 오르자 쌀 소비량 급감 항산화 효과에 비만-당뇨 예방 등 기능성 강조한 품종 연구에 매진
경북 예천의 유색 벼 아트.
녹색혁명의 주역, 통일벼
경기 수원시에 있는 녹색혁명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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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혈연이 다른 벼 계통(인디카·자포니카)을 교잡해서 두 계통의 장점을 보유하는 잡종 볍씨를 얻었다. 이 잡종 볍씨들은 1967년 농촌진흥청에서 2년간의 시험 재배를 거친 후 양 계통의 우수 형질들이 고정된 ‘IR667’로 개발됐다. 이렇게 생산된 계통은 1970년 작물시험장 온실과 1년에 여러 차례 벼 재배가 가능한 필리핀에서 대량으로 증식돼 1971년 수원, 밀양, 이리(현 익산) 등 농업시험장에서 시험 재배에 성공했다. 당시 이 성과에 고무된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말 계통 이름인 IR667을 대신해 ‘통일벼’라 이름 짓고 대대적인 보급을 지시했다. 통일벼 보급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순간이었다.
1971년 통일벼가 농가에 처음 보급된 이후 1974년에는 재래 품종 대비 30% 이상 증산 실적을 내면서 3080만 섬(445만 t)을 생산했다. 1975년에 처음으로 주곡 자급을 달성했고, 1977년에는 통일형 벼가 전체 벼 재배 면적의 절반을 넘으면서 4170만 섬(600만 t)을 생산해 세계 최고의 생산성을 기록했다. 녹색혁명으로 고질적인 식량 부족 문제를 떨쳐내고 식량 자급 국가로 탈바꿈하게 돼 더는 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렇게 통일벼가 불러온 녹색혁명은 온 국민의 소망인 주린 배를 채워줬으며 국가 경제 발전과 산업화의 기반이 됐다. 2009년 교육과학기술부는 ‘국가연구개발 반세기 10대 성과’의 첫 번째 성과로 통일벼를 선정했다. 누구나 인정하는 결과였다.
쌀, 배고픔의 극복을 넘어 효능과 건강에 눈 뜨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며 주곡의 자급자족을 달성했던 통일벼에 시간이 지나면서 시련이 찾아왔다. 1978년 이후 연이은 병충해와 기상이변으로 인한 흉작은 식량 수입을 촉발하면서 식량 안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이후 경제 수준과 식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맛이 떨어지는 단점의 통일벼는 그 매력을 점점 잃어가게 됐다. 1980년대 이후 계속되는 대풍과 쌀 소비 감소로 1989년부터 쌀이 남아돌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는 매력을 잃었고 정부가 보급종 볍씨 공급을 끊으며 수매를 중단하게 됐다. 양에서 질로 식량 생산 정책도 바뀌었다.통일벼는 퇴조했지만 육종 과정에서 축적된 유전자원과 육종 기술은 맛과 건강을 앞세운 기능성 벼 육종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1990년대 이후로는 까다로워지는 소비자의 입맛을 공략하기 위해 수량이 아닌 맛으로 승부하는 벼 육종으로 품종 개발의 방향이 바뀌었다. ‘운광벼’ ‘고품’ ‘하이아미’ ‘삼광’ ‘호품’ ‘칠보’ 등 모양과 밥맛, 내재해성까지 갖춘 최고 품질의 품종들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외관, 밥맛, 완전미, 내재해성을 갖춘 최고 품질 벼들은 기존의 비교 대상이던 일본 쌀에 뒤지지 않는 맛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면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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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에 관한 관심 증가로 건강 증진과 의약 보조용으로 기능 성분을 강화한 맞춤형 기능성 쌀에도 수요자의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성장기 어린이를 대상으로 개발된 ‘하이아미’와 ‘영안벼’는 필수아미노산 함량이 일반 벼보다 높다. ‘눈큰흑찰’은 알코올을 분해하는 효과가 있는 억제성 신경전달물질 ‘GABA’를 많이 함유한 품종이며, 비만 억제 효과가 높은 다이어트용 쌀 ‘고아미4호’는 식이섬유 함량이 높으며 철분과 아연 함량도 높아 빈혈 예방에 적당하다. 비만과 당뇨 예방에 효과가 좋은 쌀 ‘도담쌀’은 지방을 배출하고 혈당을 천천히 올려 혈당 관리에 도움이 되는 저항 전분이 일반 쌀 대비 10배 이상 많은 품종이다. 베타카로틴이 풍부한 ‘황금쌀’과 당분 함량이 증가된 기능성 쌀 등 다양한 기능성 벼 품종이 개발돼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최근에는 가공 용도별 맞춤형 벼도 탄생하고 있다. 현대인의 식생활 변화로 쌀 소비도 다양해지면서 쌀 가공식품이 등장했으며 가공식품의 종류별로 적합한 쌀 품종이 개발되고 있다. 특히 쌀 공급 과잉 문제를 해결하고 수입에 의존하는 밀가루 수요 일부를 대체하기 위한 대안으로 개발된 가루쌀 ‘바로미2’ 품종의 산업화는 최근 농업 정책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쌀이 아닌 밥으로 유통되는 포장밥 등 다양한 쌀 가공식품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쌀국수용 ‘새고아미’, 무균포장밥·쌀빵용 ‘보람찬’, 도시락용 ‘미호’와 발아현미용 ‘삼광’ ‘큰눈’ 등 7개 품종이 계약 재배 중이다.
막걸리 등 우리 전통주 열풍은 줄어드는 쌀 소비의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했고 이런 흐름 속에서 주정용 벼 ‘설갱’도 탄생했다. 설갱은 찹쌀같이 보이는 하얀 멥쌀로 전분 구조가 둥글게 생김으로써 빈 공간이 많아 부드럽고 발효가 잘되는 양조 전용 쌀로 일반 쌀로 빚은 술과 비교해 나쁜 냄새가 적고 향내가 은은하며 신맛과 쓴맛이 적은 담백한 술맛을 연출하면서 ‘백세주’로 탄생하기도 했다.
외래 품종 벼 대체의 시동을 걸다 품종 독립
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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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들과 알찬미는 경기 이천뿐 아니라 충북 진천과 청주 등 외래 벼가 많이 재배되는 지역에 중점적으로 보급돼 올해 약 1만 ㏊에서 재배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2020년에 설정한 외래 벼 재배 면적 감축 목표 4만7000㏊의 21%에 해당한다. 이와는 별도로 농촌진흥청은 이천시와 관계 기관 협의체를 구성해 종자 생산·공급 체계 확립, 생산 단지 조성, 품종 맞춤형 재배법 개발, 단백질 차등 수매제 도입, 품종별 쌀 포장재 디자인, 해들과 알찬미 맞춤형 취사 기능이 적용된 밥솥 개발도 추진하고 있다. 바야흐로 벼도 일본의 품종을 벗어나 품종 독립 시대를 향해 가고 있다.
알찬미
국내를 넘어 국제사회로 나가는 우리 쌀
아프리카 서부 해안의 작은 나라 세네갈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지만 낙후된 생산 기술로 아프리카 최대 쌀 수입국 중 하나다. 농촌진흥청이 추진하는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은 세네갈의 쌀에 주목했다. 세네갈을 포함한 아프리카의 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진흥청의 KAFACI(한-아프리카 농식품 기술협력 협의체)는 국제농업연구연합기구(CGIAR) 산하 아프리카벼연구소와 협력해 ‘아프리카 벼 개발 파트너십’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한국의 벼 육종 전문가인 강경호 박사(왼쪽에서 첫 번째)가 아프리카 전문가들과 함께 ‘이스리-6’ 쌀을 도정하기 전에 건조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이들 중 2017년 12월 세네갈에서 등록된 ‘이스리-6’과 ‘이스리-7’ 품종은 수량성이 우수하고 밥맛이 좋아 현재 빠른 속도로 농업인들에게 보급되고 있다. 이 두 품종은 우리나라 통일형 벼 계통인 ‘밀양23호’와 ‘태백’을 세네갈로 가져가 현지 적응 시험을 거쳐 등록된 것인데 수량성이 1㏊당 7.2∼7.5t으로 세네갈 대표 품종인 ‘사헬’보다 2배 정도 많다.
농촌진흥청이 통일형 벼를 도입해 아프리카 기후와 토양에 적합하게 품종 개량한 이스리-6, 7 품종이 세네갈에 보급되면서 큰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세네갈 농업연구청의 벼 육종가인 오마르 은다우 파예 씨는 “이스리가 기존 재배하던 사헬보다 수확량이 2배 많고 도정률이 높아 생산성과 소득 향상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 세네갈에서 이스리 쌀을 판매하고 있는 지역 개발 여성 단체의 은다에 씬 뚜레 씨는 “이스리는 사헬보다 요리할 때 물과 기름이 적게 들고 밥하는 시간을 대폭 줄여줄 뿐 아니라 소화도 잘되고 밥맛도 좋아 이것만 찾게 된다”며 “한국에서 온 이스리는 세네갈인들에게 내린 축복”이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최근 농진청의 KAFACI와 KOPIA(해외농업기술개발사업)를 중심으로 농식품부, 농어촌공사, 유엔세계식량계획(WFP) 등이 협업해 아프리카 벼 품종 개발과 종자 보급 체계를 구축하는 K-라이스벨트 사업이 막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보릿고개를 해결해 준 통일벼가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큰 힘을 발휘하면서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 녹색혁명의 바람을 일으키며 우리 쌀의 무궁무진한 진화라는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안소희 기자 ash030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