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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관두고 그냥 쉰다”… ‘재취업 번아웃’ 청년 29만명

입력 | 2023-06-08 03:00:00

‘아무것도 안하는’ 청년 39만명
4명중 3명은 직장 경험 있지만
“구직 엄두 안나” 재취업 포기




국내 4년제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이수영(가명·28) 씨는 졸업 후 대기업 입사를 원했지만 여러 차례 낙방한 끝에 중소 교육 콘텐츠 제작 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각종 허드렛일까지 도맡아야 하는 ‘일당백’ 신입 생활에 지쳐 1년여 만에 퇴사했다. 이후 출판사에 들어갔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1년여 만에 그만뒀다. 퇴사한 지 1년이 넘은 현재는 구직 활동을 그만둔 채 쉬고 있다. 이 씨는 “다시 ‘취업 전쟁’에 뛰어들 엄두가 안 난다”고 말했다.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15∼29세 청년 비(非)경제활동인구 중 학업, 취업 준비 등의 활동 없이 그냥 ‘쉬고 있다’는 청년은 약 39만 명이었다.

동아일보가 고용노동부와 이를 분석한 결과 이들 39만 명 중 직장 경험이 있는 청년이 29만2000명이었다.

기자가 만난 청년들은 구직, 취업, 퇴직 과정에 지쳐 한동안 재취업을 미루거나 포기한 상태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번아웃(burnout·극도로 지침)’되어 일을 그만둔 뒤 다시 취업 전선에 나서지 않는 청년이 증가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재취업 도전 두렵다”… 졸업 3년 지나도 그냥 쉬는 청년 15만명


‘재취업 번아웃’ 청년
구직에 지치고 입사해도 미스매치
“힘든 취업 경험 탓 자존감 떨어져”
진로 교육-일 경험 기회 늘리고… 中企 지원으로 임금 격차 줄여야

지난해 15~29세 청년 비경제활동인구 중 학업, 취업, 직업훈련 등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그냥 ‘쉬고 있다’는 청년 4명 중 3명은 직장을 다닌 경험이 있는 청년이었다. 직장 한두 곳을 다니다가 힘들거나 혹은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다 퇴직하는 ‘번아웃(burn out·극도로 지침)’상태에서 취업을 포기한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뉴시스

일을 안 할 뿐 아니라 학업이나 취업 준비도 하지 않고 ‘그냥 쉰다’는 청년들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사태 당시에는 경제 불황의 여파로 일자리가 감소하며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쉬고 있다’고 답한 청년이 2020년 44만8000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하기도 했다. 지난해 코로나19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되면서 그 수가 다소 줄긴 했지만, 전체 청년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반적으로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

● “자존감 떨어지고 도전 두려워” 쉬는 청년들

‘일하다 쉬고 있는’ 청년 29만2000명의 절반(15만 명)은 졸업 후 3년 이상 지난 상황이었다. 한창 일을 하거나 안정적인 일자리에 진입할 시기에 뒤늦게 ‘쉼’을 선택한 청년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한 번 이상 구직, 취직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지친 청년이 많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전문가들은 “구직과 취직, 이직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번아웃(burnout·극도로 지침)’이 왔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실제 동아일보가 취업 후 오랫동안 쉬고 있거나 쉰 경험이 있는 청년 9명의 사례를 들어 보니 △오랜 취업 준비와 실패 과정에 지쳤고 △취업한 일자리가 생각보다 힘들었고 △그로 인해 퇴사한 후 다시 취업을 준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게 이들이 쉬고 있는 주요 이유였다. 서울 시내 한 대학에서 외국어를 전공했다는 김수진(가명·27) 씨는 취업 과정이 힘들어 한동안 쉰 경우다. 김 씨는 “졸업 이후 23개월 동안 입사지원서만 100개 정도 썼다”고 했다. 그는 “외국어에는 자신이 있었고 교직 이수까지 했지만 자격증 있고 외국어 잘하는 지원자들이 너무 많았다”며 “계속 떨어지다 보니 지쳐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고 털어놨다. 원래 대기업 마케팅팀에 입사하는 것이 꿈이었던 김 씨는 취업을 포기하고 약 1년간 쉰 뒤 최근 한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2년제 전문대를 졸업한 뒤 2019년 중소기업에 취업한 주승연(가명·29) 씨는 입사 1년 반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벌써 3년째 쉬고 있다. 주 씨는 “취업 준비만 3년 하다가 입사했는데 막상 들어간 회사는 너무 힘들고 나와 맞지 않았다”며 “취업 경험 탓에 자존감, 자신감이 떨어져 다시 취업에 도전하기도 두렵다”고 밝혔다.

구직과 취직을 반복하다 결국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장기간 취업 포기 상태에 이른 청년들도 있었다. 혈액관리본부에서 근무했던 김태영(가명·29) 씨는 일을 관둔 뒤 아르바이트를 포함해 다양한 일자리를 전전하다가 현재는 5년째 쉬고 있는 상태다. 김 씨는 “이제는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찾기 어렵다”며 “단기 아르바이트로 생계비는 벌 수 있다. 한동안 취업 준비는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청년 무직자’를 뜻하는 니트(NEET)족을 연구해 온 김기헌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청년정책연구실장은 “한국 청년들의 졸업 후 취업 소요 기간은 평균 10∼11개월이지만 단기간 내 퇴사 혹은 이직하는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높다”며 “일단 취업을 하지만 취업 과정이 힘들고 원하는 일자리와 실제 취업한 일자리의 ‘미스매치(불일치)’도 크다 보니 그만두고 한동안 취업에도 뛰어들지 않는 ‘쉬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 “진로교육 늘리고 임금 격차 줄여야 해결”

청년 인구가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매년 수십만 명의 청년이 경제활동을 포기하고 ‘쉬는 상태’라는 점은 사회적으로도 큰 부담이다. 더구나 이런 청년 중 일부는 자력으로 사회활동에 복귀하는 것이 불가능한 은둔·고립형 청년이 될 가능성도 크다.

20대 후반부터 7년째 쉬고 있는 유서영(가명·34) 씨는 “공무원시험을 오랫동안 준비했지만 연이어 낙방한 뒤 불안감과 우울함이 커져 집에만 있는 상태”라며 “이제는 재취업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두렵다. 다시 사회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조 씨는 현재 지자체의 은둔·고립형 청년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고 있다.

부실한 진로 교육과 일자리 미스매치로 청년들이 취업시장에서 고전하는 것이 ‘번아웃’ 청년을 양산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실장은 “중고교와 대학 재학 동안 조기 직업교육을 통해 대부분 졸업 전 진로와 취업을 결정짓는 유럽, 일본 등과 달리 한국의 청년들은 진로, 직업에 대해 교육받을 기회도 없이 취업시장에 뛰어든다”며 “이러다 보니 취업 준비 기간도 길고 취업 후 일자리 미스매치로 퇴사하고 뒤늦게 다시 취업을 준비하는 비율도 높다”고 말했다. 중고교생 단계에서부터 진로를 고민할 기회를 주고 일 경험 기회도 확대해 미스매치를 줄여야 한다는 조언이다.

길현종 한국노동연구원 사회정책연구본부장은 “일자리의 급여와 처우 차이가 극명하다 보니 모두가 좋은 직장을 향해 달리고, 거듭 실패한 청년들은 낙담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다”며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번아웃’ 청년이 느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짚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근로자 사이의 임금, 고용 여건 격차를 뜻한다.

길 본부장은 “이중구조 격차가 커지면 커질수록 양질의 일자리를 얻는 데서 낙오하고 쉬는 청년이 더 늘어날 것”이라며 “중소 규모 기업에 대한 지원을 늘려 기업 간 임금 격차를 줄이고 이런 곳에 취업한 청년들에 대한 지원도 강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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