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24년 만에 새주인 모두 찾은 대우… ‘간판’ 사라져가도 ‘대우맨’은 남아

입력 | 2023-05-06 03:00:00

[토요기획] 대우그룹 해체 후에도 남은 흔적들
공정위, 한화의 대우조선 인수 승인… 그룹 해체 후 마지막 ‘주인 찾기’
‘티코’ ‘탱크주의’로 한때 재계 2위… 국내보다 해외 시장 개척에 역점
해체 직전 한국 수출 14% 담당… 대우맨들, 산업현장서 여전히 활약




《그룹 해체 24년… 사라져가는 ‘대우 간판’

한때 재계 서열 2위를 차지했던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24년이 흘렀다. 경차의 상징 ‘티코’, 고장 없는 가전 ‘탱크주의’ 등으로 한국 산업계에 한 획을 그으며 세계 무대를 뛰었던 ‘대우맨’의 자취를 되짚어봤다.



1992년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대우전자 사옥 앞에서 대우자동차 ‘티코’에 탑승하는 모습. 김 회장은 당시 청와대를 출입할 때도 이 차를 업무차로 썼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대우조선해양이 20년 넘게 주인을 찾지 못해 안타까웠죠. 그래도 마침내 인수가 됐으니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난달 28일 낮 서울 종로구 대우재단. 전날 공정거래위원회가 한화의 대우조선 인수를 조건부 승인했다는 얘기를 꺼내자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한 말이 “잘된 일”이었다.

‘4월 27일’은 고 김우중 대우그룹 명예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 온 장 회장을 비롯한 대우맨들에게 조금은 특별한 날이 됐다. 1999년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이후 뿔뿔이 흩어진 대우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마침내 모두 새 주인을 찾게 된 순간이었다.》




대우그룹 해체 후 24년이 흐른 지금, 대우의 흔적도 한국인의 삶과 기억에서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다. 기업명에 ‘대우’를 쓰는 곳도 점차 줄어들어 대표 계열사 가운데는 ‘대우건설’ 정도가 유일하다. 시간이 흐르며 대우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많은 대우맨도 현업을 떠났다. 김 회장이 작고한 지 4년이 지났지만 세계경영과 분식회계라는 삶의 명암이 재계에서 여전히 회자되고 있을 뿐이다.

대우는 한국 산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국내외 35만 명의 대우맨이 41개 계열사에서 활약하며 현대에 이은 재계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김 회장의 회고록 제목처럼 해외에서 가장 공격적으로 새 시장을 개척한 기업이 대우였다. 국내 최초의 경차로 국민차 타이틀을 얻었던 ‘티코’, 튼튼한 가전제품을 만들겠다는 슬로건 ‘탱크주의’ 등은 대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단어들이다. 그룹이 해체되고 나서 사반세기 동안 대우맨들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대우가 남긴 유산들은 한국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 세계로 나섰던 재계 2위 대우

1999년 5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서울 남산 힐튼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시 트럼프 그룹 회장과 만나 인사하고 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삼성에도 합격했지만 대우를 선택했죠.”

현재 서울의 대기업을 다니는 A 부장은 1993년 입사 당시 대우의 위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친구를 따라 우연히 대우 채용설명회에 갔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TV 수출 담당자가 ‘수출’을 영어로 ‘익스포트(Export)’가 아니라 ‘오버시스 세일즈 마케팅(Overseas sales marketing)’이라고 설명한 점이 그의 마음을 움직여 원서까지 냈다. A 부장은 “세계를 무대로 수출을 위해 현장을 다닐 수 있다는 대우의 세계 경영 철학이 마음에 들었다”며 “수습사원이었던 입사 3개월 차부터 유럽 곳곳을 돌아다녔다”고 기억했다.

대우는 세계를 무대로 승승장구했다. IMF 경제위기 직전에는 현대에 이어 자산총액(76조7000억 원) 재계 2위에 올랐다. 계열사는 41개, 해외법인과 지사망은 600여 개에 달했다. 대우맨들은 국내 10만 명, 해외 25만 명으로 총 35만 명이었다. 대우의 1998년 수출액은 186억 달러. 한국 총수출액 1323억 달러의 약 14%를 차지했다.

대우는 1967년 김 회장이 만 30세의 나이에 원단업체인 대우실업을 창업하며 시작됐다. 1975년 대표적인 종합 무역상사로 발돋움하며 국내 중소기업들의 수출 창구 역할을 했다. 이후 한국기계(대우중공업),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대한조선공사(대우조선해양) 등 부실기업을 인수한 뒤 경영을 정상화하며 중화학 업계를 선도했다.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오른 시점이었다.

1999년 4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대우자동차 디자인센터에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신타 ‘마티즈’를 직접 소개하고 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비슷한 시기 에콰도르(1976년),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까지 진출하며 해외 보폭을 넓혔다. 1982년 ㈜대우를 설립한 뒤 자동차 중공업 조선 전자 통신 정보시스템 금융 호텔 서비스 등 산업 전반에 걸쳐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의 모습을 갖춘다. 한 대우 출신 기업인은 “1990년대 해외 출장을 나갈 때 여권 케이스에 대우 마크만 있으면 VIP 대접을 받았을 정도”라며 “지금은 ‘국뽕’(애국심을 표현하는 비속어)이란 말을 많이 쓰지만, 그에 비유하자면 ‘대뽕’(대우+국뽕)이 느껴지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1990년대 가전 시장은 삼성-LG-대우의 3파전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양대 강자 사이에서 대우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았다. 1993년 배순훈 대우전자 사장은 오랜 기간 고장 없이 튼튼하게 쓰는 제품을 만들겠다는 탱크주의 슬로건을 내세웠다. 기본에 충실한 핵심 기능에 집중하고 가격은 낮춘 마케팅이 주효했다. 자동차에서는 1991년 출시된 ‘티코’의 성공이 있었다. 당시 전무하던 경차 시장에 최초로 뛰어들어 300만∼400만 원대의 저렴한 가격으로 ‘서민들의 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대우조선 역시 한때 선박 수주 세계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영원할 것 같던 대우의 성공가도는 외환위기를 맞아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된다. 1998년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지만 실패로 끝났고, 1999년 지주사 ㈜대우까지 워크아웃을 신청하며 창업 32년 만에 그룹이 해체됐다. 김 회장은 2006년 대우그룹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징역 8년 6개월형과 추징금 17조9254억 원이 확정됐다.

재계 서열 2위 그룹의 갑작스러운 몰락은 한국 경제에 큰 부담으로 돌아왔다. 수많은 대우맨과 협력사 직원이 갑자기 일자리를 잃었다. 굵직굵직한 기업들이 무더기로 채권단 관리하에 들어가면서 국민 혈세가 투입됐다. 일반 국민들도 간접적으로 고통을 분담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김 회장과 대우는 도전적인 세계 경영이라는 찬사와 함께 무리한 차입 경영에 대한 비판도 늘 뒤따른다.

● 대우조선도 ‘대우’ 떼고 ‘한화오션’ 유력
그룹 해체 후 대우의 각 계열사는 한동안 주인을 찾아 헤매야 했다. ㈜대우 무역 부문은 포스코인터내셔널, 대우전자는 위니아전자, 대우증권은 미래에셋대우, 대우자동차는 한국GM 등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화에 인수된 대우조선의 새로운 사명도 대우가 빠진 ‘한화오션’이 유력하다. 대우 색채를 빼고 인수한 기업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통일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들이었다. 대우 출신인 국내 대기업의 B 사장은 “대우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인수한 기업들이 대우가 가진 장점을 더해 시너지를 내며 여전히 한국 산업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며 “대우 출신이라고 하면 ‘맡기면 어떻게든 해낸다’는 인식도 기업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세월이 흐르며 퇴직한 대우맨도 늘고 있다. 약 1600명의 퇴직 임원 모임인 ‘대우회’ 평균 연령은 약 75세라고 한다. 하지만 1980, 90년대 입사한 대우맨들은 새로운 기업으로 회사를 옮겨 일하거나 창업을 하며 한국 주요 산업군에 자리잡고 있다. 대우자동차 최연소 임원 출신인 서정진 셀트리온 명예회장이 대표적이다. 김우중 회장 비서실 출신인 정인섭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사장은 이번 대우조선의 한화 인수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이 밖에도 강석훈 KDB산업은행 회장, 정탁 포스코인터내셔널 부회장, 김상태 신한투자증권 대표 등이 대표적인 대우 출신 기업인이다.

해외에서는 대우의 브랜드 파워도 여전히 살아 있다. 내수보다 해외를 중심으로 시장을 개척한 대우는 지난해 91억 원의 상표권 수익을 냈다. 동유럽이나 동남아시아, 중동 등 해외 가전기업들이 대우 브랜드를 아직 쓰다 보니 ㈜대우가 이름을 바꾼 포스코인터내셔널이 수익을 받는 구조다. ㈜대우에서 25년 근무한 뒤 퇴직한 김주완 두리코씨앤티 대표는 “베트남에서 현지 직원이 주말에도 대우 유니폼을 입고 다니길래 이유를 묻자 ‘대우가 자랑스러워서’라고 하더라”면서 “해외에는 아직 대우 가전을 쓰거나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이 있고, 대우 브랜드도 여전히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대우에서 40년 근무한 국내 대기업 C 대표는 “아무것도 없던 해외에 사업 기반을 만들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정신이 대우의 가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것 같다”고 했다.

대우맨들이 모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이런 대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창립기념일인 3월 22일 매년 행사를 열고 있다. 전직 임직원들이 그룹 해체 10년이 지난 2009년 발족한 이 모임은 한국 청년들의 해외 취업과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을 돕는 일을 맡고 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장 회장에게 미래 세대에게 대우가 어떻게 기억될 거라고 예상하는지 물었다. 장 회장은 또 한 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내놓은 답은 이랬다.

“어떤 이유든 기업이 존속하지 못하고 망했으니 사실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도전하며 세계로 나섰던 대우의 기업 정신은 어떤 형태로든 후세에도 이어져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