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탄생 150주년, 라흐마니노프가 마주친 ‘세계의 낯섦’[유윤종의 클래식感]

입력 | 2023-03-28 03:00:00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 4. 1.∼1943. 3. 28.). 그는 한때 ‘감상적이고 낡은 음악’을 쓴 인물로 치부되었지만 최근 그가 가진 혁신성이 재발견되고 있다. 동아일보DB

유윤종 문화전문 기자


“나는 낯설어진 세계를 방황하는 유령 같다고 느낀다.”

오늘(28일) 서거 80주년을 맞은 러시아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그를 말해주는 세 가지 키워드는 ‘엄청난 기교의 피아니스트’ ‘감상주의(센티멘털리즘)’ 그리고 ‘망명’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혁명이 일어나자 서유럽을 거쳐 미국에 정착했다. 그러고는 다시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라흐마니노프가 마주친 ‘세계의 낯섦’은 고향과 타향의 차이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다. 시골의 부유한 장원에서 자라난 라흐마니노프는 뉴욕 마천루의 엘리베이터와 마주쳐야 했다.

그는 유럽 낭만주의 음악의 품 안에서 자라났고 ‘음악은 일상의 사랑스러운 감정들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 차이콥스키를 경모하며 작곡을 연마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세계 음악계는 음계를 파괴한 쇤베르크의 무조주의적 음악이나 ‘봄의 제전’으로 대표되는 스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적 음악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서두에 소개한 라흐마니노프의 말은 새로운 시대의 문화적 지향과 예술적 환경에 대한 소외감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런 소외감이 타국에 발을 디딘 러시아 작곡가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라흐마니노프보다 여덟 살 위였던 핀란드의 교향악 거장 시벨리우스는 오스모 벤스케 지휘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이달 24, 25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연주한 교향곡 6번(1923)을 작곡하면서 “오늘날 여러 음악가들이 온갖 복잡한 칵테일을 섞는 데 열중하지만 나는 맑은 생수를 내놓겠다”고 말했다. 라흐마니노프보다 열다섯 살 위였던 이탈리아의 오페라 거장 푸치니는 자신이 혼란하게 느낀 예술계의 기류에 대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아름다운 음악으로 응답할 것이다. 이 미친 세상에 대항하기 위해”라고 편지에 썼다.

푸치니는 1924년 세상을 떠났고 시벨리우스도 비슷한 시기에 대부분의 작곡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스스로 명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였던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에서 자신의 ‘구식’ 음악을 연주하며 수입을 이어 나가야 했다. 대중들은 열광했지만 비평가들은 따가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고 그의 음악은 ‘단순함, 가요적, 선율미에만 의존하는 개성 없는 작품’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음악사 전공자들의 필수 참고자료 중 하나인 그로브 음악사전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단조롭고 인공적이며 분출하는 선율뿐’이라고 단언했다. 뉴욕타임스의 평론가를 지낸 해럴드 숀버그가 이에 대해 ‘터무니없이 젠체하며 멍청한 얘기’라고 반박한 게 다행이었다.

올해는 라흐마니노프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다. 오늘 서거 80주년에 이어 나흘 뒤인 4월 1일에 ‘거짓말처럼’ 그의 생일이 돌아온다. 이 사실이 그의 재평가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지난해 뉴욕에서 열린 바드 음악축제는 라흐마니노프의 숨은 혁신성을 탐구하는 자리였다. 그의 음악 어법이 지닌 개성 및 동시대 대중음악과의 상호 영향, 현대 문명에 대한 반응 등도 진지하게 탐구됐다. 2020년 KAIST 문화기술대학원의 박주용 교수는 여러 작곡가의 화음 연결 패턴을 분석한 빅데이터 분석 결과 ‘고전음악 작곡가 중 가장 혁신적인 화음 연결을 사용한 작곡가는 라흐마니노프’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일반적인 음악 팬에게는 재평가라는 말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2021년 영국 ‘클래식 FM’이 집계한 ‘가장 사랑받는 작곡가’ 순위에서 라흐마니노프는 브람스와 드보르자크 다음 자리인 27위를 차지했다. 2015년 KBS 클래식FM이 설문 조사를 통해 집계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1위는 그의 피아노협주곡 2번이었다. 임윤찬이 밴 클라이번 콩쿠르 결선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을 연주한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음질 개선 재업로드 버전을 포함해 26일 현재 1178만 뷰를 기록 중이다.

20세기 음악은 시벨리우스의 표현대로 ‘수많은 칵테일을 섞었고’, 당시까지 모색되지 못한 수많은 음향과 미학의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음악 팬들은 선율적이고 감상적인 음악을 들으며 일상의 위안을 얻고 있다. 다음 세대에도 그럴 것이라는 데 감히 많은 것을 걸 수 있다.



유윤종 문화전문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