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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 휘몰아치는 폭풍우, 철썩이는 파도…사회 현실 그린 ‘만선’

입력 | 2023-03-23 11:44:00


가난한 어부 곰치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에도 만선을 꿈꾸며 바다로 나가는 고집스러운 인물이다. 그는 비극 한가운데서도 “곰치가 손에서 그물을 놓는 날엔 차라리 내 배를 가르고 말 것”이라며 절규한다. 국립극단 제공.



먼 곳에서 잔잔한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찰싹이는 소리 속 갈매기 울음도 껴있다. 평화로운 어촌 마을 뒤편에선 만선을 뜻하는 오방색 깃발이 잔바람에 나부낀다. 부둣가에 가난한 어부 곰치네 가족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모여 굿을 펼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기필코 만선일 것”이라는 무당의 말에 환호하던 이들의 간절한 마음은 거친 숙명과 선주의 횡포 앞에서 이내 절규로 돌변한다.

16일부터 서울 중구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중인 연극 ‘만선’의 도입부다. 극작가 천승세가 쓴 희곡을 국립극단이 2년 전 창단 70주년을 맞아 선보인 작품이다. ‘만선’은 1960년대 남해안의 작은 섬마을에서 만선을 꿈꾸는 곰치네 가족의 비극적 삶을 이야기한다. 평생을 골몰한 ‘배 타는 일’ 때문에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곰치 역은 배우 김명수가, 그의 아내 구포댁 역은 정경순이 맡았다. 약 60년 전 초연된 작품이지만 자본가의 횡포, 세대 간 갈등을 다룬 장면 등은 오늘날의 사회상과도 맞닿아있다.

당시의 말투를 생생하고 구수하게 담아낸 대사들은 ‘만선’의 묘미다. “부서(보구치) 떼가 사태라우” 등 토속적인 단어와 말투는 다소 낯설게 들리기도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배경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강인하면서 재치 있는 여성 주인공 구포댁은 “배암 섯바닥처럼 비양질 헌다(뱀 혓바닥처럼 비아냥거린다)” 등 방언 빼곡한 대사를 찰지게 구사해 말맛과 극적 재미를 더했다.

쓰나미처럼 무대를 뒤덮는 엔딩 장면은 연극 ‘만선’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강력한 빗줄기는 무대 뒤편에 설치돼있는 1t짜리 물 탱크 5개에서 끌어다 쓴다. 국립극단 제공.



2~3t에 달하는 빗줄기가 무대에 휘몰아치며 거친 폭풍우를 구현한 엔딩은 공연의 백미로 꼽힌다. ‘만선’ 무대는 제55회(2018년), 제42회(2005년) 동아연극상에서 무대미술상을 수상한 이태섭 디자이너가 2021년 초연과 재연 디자인을 모두 맡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마저 무대 위에 재현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무대를 구상한다”며 “올해 공연에서는 백척간두의 위험함과 비극성을 강화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초연에선 굵은 비만 내렸다면 이번엔 자욱하게 날리는 안개비 장치를 추가해 위태로움을 강조했다. 엔딩 장면에선 특별 제작한 강풍기 1대를 포함해 총 4대의 서큘레이터를 돌린다. 무대 끝자락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곰치네 집의 양철지붕은 몰아치는 비바람에 하릴없이 흔들리며 관객의 귀에 둔탁한 소리를 남긴다.

구포댁(맨 왼쪽)과 곰치가 가진 만선의 꿈은 악랄한 선주 임제순(맨 오른쪽)의 횡포 앞에서 좌절당한다. 국립극단 제공.



‘만선’이 사회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실주의 희곡인 만큼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을 최대한 현실적으로 살려낸 무대도 볼거리다. 이 디자이너는 “극 전반에 난파선 느낌을 주기 위해 무대 바닥 전체를 단가 높은 송판으로 제작했다”며 “배우들이 앉거나 발을 올리는 돌 역시 스티로폼 모형이 아니라 쌀 한가마니 무게에 달하는 실제 돌”이라고 말했다. 방파제에 부딪친 듯 포물선을 그리며 철썩이는 파도는 무대 뒤편 스탭들이 직접 바가지로 물을 흩뿌려 표현한다.

배우들이 흠뻑 젖을 정도로 물이 사용되는 만큼 안전성을 높이려는 심혈도 기울였다. 나혜민 무대감독은 “공연 중 사용된 물이 새지 않도록 무대 하단 전체를 빈틈없는 수조로 만든 뒤 방수포와 비닐로 3~4겹 감쌌다”며 “강수장치 역시 조명기를 비롯한 전기 설비보다 낮은 위치에 설치해 물이 닿지 않도록 했다”고 말했다. 이어 “무대 바닥은 거친 질감을 낸 뒤 여러 겹 코팅함으로써 미끄러움을 최소화했고 공연 후 1시간이면 물은 전부 마른다”고 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