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1년〈中〉식량-에너지 무기화
우크라이나 체르니히우에 있는 한 축사가 불에 타 기둥과 뼈대만 남아 있다. 지난해 3월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축사에 불이 붙어 1000마리가량의 소와 돼지가 몰살됐다. 체르니히우=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키이우·체르니히우·비타치우=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이로 인한 ‘애그플레이션’ 또한 세계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농업’과 ‘인플레이션’의 합성어로 곡물 등 농산물 값 인상이 주도하는 물가 상승을 뜻한다. 애그플레이션은 경제 구조가 낙후된 개발도상국에 더 큰 타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전 세계 식량 안보와 개도국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짓밟힌 곡창지대… “러시아가 대기근 일으킬까 두려워”
우크라 농장-시장 가보니
비료-연료-물류대란에 직격탄… “곡물 생산비용 감당 못해 최악”
식량난에 곡물가게-빵집 폐업… “빵 있는 한 삶은 이어진다” 희망도
식량 배급 받는 우크라 주민들 12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스비아토히르스크 마을 주민들이 ‘월드센트럴키친’ 자원봉사자들이 나눠주는 음식을 받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스비아토히르스크=AP 뉴시스
실제 그의 가게 옆 곡물 가게의 셔터는 굳게 내려져 있었다. 인근 빵집 또한 간판만 남긴 채 텅 비어 있었다. 비옥한 곡창지대가 파괴되며 급등한 곡물 가격이 키이우 서민의 삶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힌 것이다.
테레셴코 씨 역시 “곡물을 생산해도 운송 수단을 구하기 힘들 뿐 아니라 물류 가격도 비싸다”고 했다. 그는 “도무지 오른 생산 비용을 감당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농부 인생 최악의 시기”라고 토로했다.
●러 천연가스에 의존하는 비료 생산도 난항
베사라비안 시장에서 장을 보던 유리 크레민스키 씨 역시 “연료비 등 다른 물가가 곡물 가격을 더 끌어올리고 있다”고 했다. 전쟁 후 1년간 비료와 연료 부족, 물류 대란이 기존의 식량난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이미 우크라이나를 넘어 전 세계인의 밥상과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지난해에만 굶주림에 시달리는 인구가 3억4500만 명에 달한 것으로 지난달 추산했다. 전 세계 인구의 4%가 넘는 것으로, 사상 최대 규모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또한 올해 세계 곡물 생산량이 전년에 비해 1.7%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곡물 생산이 줄면 ‘애그플레이션’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는 지난해 2월 침공 후 5개월간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길을 차단했다. 전 세계적인 비난 여론이 고조되자 같은 해 7월 흑해를 같이 접한 튀르키예의 중재로 일부 수출을 허용하는 ‘흑해 곡물 협정’을 맺었다. 이후 한 차례 유효 기간을 연장해 올 3월까지의 수출을 겨우 보장받았다.
그러나 협정을 다시 연장하지 못하면 곡물 수출길이 다시 막힌다. 이는 사실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마음에 달린 상황이다. 전 세계 식량위기가 다시 고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소벨 콜먼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차장은 미 뉴욕타임스(NYT)에 “이 전쟁의 결과는 매우 파괴적”이라며 “푸틴이 수백만 명을 빈곤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기근 공포 속 “빵이 있으면 삶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옛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통치하던 1932∼1933년 스탈린 정권의 잘못된 경제 정책으로 대기근을 겪었다. ‘홀로도모르’로 불리는 이 사태로 수백만 명 넘게 숨졌다. 이로 인한 반러 감정은 아직도 우크라이나 곳곳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이날 키이우에서 남쪽으로 1시간 떨어진 비타치우를 찾았을 때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빵가게를 운영하는 이리나 소브코 씨는 “러시아가 1930년대 대기근 때처럼 인위적인 기근을 일으킬까 두렵다”고 털어놨다.
다만 그는 “할머니께서 늘 ‘빵이 있는 한 삶은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어려운 환경이어도 계속 농사를 열심히 지을 것”이라며 의지를 다졌다. 그의 남편은 러시아의 공격을 우려해 한때 소브코 씨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우크라이나를 떠나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고향을 떠날 수 없었다며 “굴하지 않고 밀을 기르고 빵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키이우·체르니히우·비타치우=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