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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붓 닿은 푸른 석벽… 대나무순이라 쓰고 비경이라 읽는다

입력 | 2022-11-12 03:00:00

[여행 이야기]힐링의 명당 충북 제천
우륵이 가야금 뜯던 천년 저수지
산 정상서 바라보는 청풍호 비경
화랑의 호연지기 뻗치는 점말동굴



희고 푸른 기암괴석이 마치 대나무 순이 솟은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옥순봉은 청풍호와 어우러져 절경을 자랑한다.


《충북 제천에는 힐링 명당 터를 재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저수지가 워낙 크고 넓어 그 자체가 천하 명당임을 알아채기 어려운 의림지가 있고, 산 정상에 올라 청풍호(충주호)의 절경에 취한 나머지 호연지기(浩然之氣)의 기상을 놓치기 쉬운 비봉산도 있다. 그뿐이랴. 제천 점말동굴은 대표적 구석기시대 유적인데, 신라 화랑들의 수행처이자 순례지였음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옥순봉과 천등산 박달재의 향기 진한 문화 스토리 역시 빠뜨리면 아쉽다.》

○물이 샘솟는 저수지 명당

소나무와 수양버들, 폭포 등 가을 산책의 운치를 즐길 수 있는 의림지 둘레길. 

제천 의림지는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다. 벽골제와 수산제는 저수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의림지만큼은 ‘현역 복무’ 중이다. 현재도 호반 둘레 1.8km 안에다 물을 가득 담아두고서 287만여 m²의 인근 들판을 기름지게 해주고 있다.

의림지 역사는 천년 세월을 훌쩍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삼한시대에 축조됐다는 말도 있고,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년) 때 악성 우륵이 용두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을 막아 둑을 만든 것이 시초라는 얘기도 전해진다.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우륵대와 집터인 우륵당 등 옛 흔적이 남아 있다.

의림지는 그 후에도 사람의 손길을 거치면서 저수지 기능을 확장해 왔다. 고려 때는 현감 박의림이 연못 주위에 3층으로 돌을 쌓는 등 개축했고, 조선시대에는 정인지(1397∼1478)가 또 손을 보았다. 당시 풍수에 해박했던 정인지는 15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의림지를 개축하면서 “샘이 밑 없는 구멍으로부터 나와 펑펑 솟아서 절로 못을 이룬다”고 묘사하는 등 의림지가 범상치 않은 명당임을 알아보았다. 호수 바닥에서 물이 솟아 나오기 때문에 둑을 의미하는 ‘제(堤)’가 아닌 ‘지(池)’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고 한다.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관개 시설이었던 의림지는 국가명승 제20호로 지정돼 있다. 뛰어난 절경으로 인해 조선 선비들의 모임 공간이던 누정(누각과 정자)도 많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영호정(1807년 건립, 1954년 중건)과 경호루(1948년 건립), 그리고 2007년 제천시가 의림지 명소화 사업으로 건립한 우륵정 등이 남아 있다. 현재 의림지는 제천 시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는 등 사계절 휴식 공간의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로 보면 의림지는 풍수 명당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명당 터는 그 기능이 오래도록 이어지는 곳이자,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의림지는 호반 주위를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명당 기운을 쐴 수 있다. 수백 년 자란 소나무 군락과 수양버들 숲, 높이 30m의 용추폭포 등은 산책의 운치를 한층 더해준다.

제천시가 4계절 산책로로 조성해 놓은 ‘삼한의 초록길’에서 만난 에코브리지는 공중정원처럼 꾸며져 있다.

의림지 아래쪽으로는 또 다른 명소가 있다. 제천시가 의림지에서 청전동까지 이어지는 2km 길에다 4계절 산책로로 조성한 ‘삼한의 초록길’이다. 농로(農路)를 확장해 놓은 듯한 길 양옆으로는 황금색 들판이 펼쳐지고, 길 중간중간에는 4계절을 주제로 한 140여 종의 식물이 늘어서 있다. 삼한의 초록길을 가로지르는 4차로 도로 위로 조성해 놓은 에코브리지(보행자용 육교) 또한 놓칠 수 없는 구경거리다. 공중정원처럼 꾸며놓은 이곳은 제천시의 새로운 관광 랜드마크로 주목받고 있다. 삼한의 초록길은 자전거로도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삼한의 초록길 입구 쪽 그네정원 바로 옆에 자리한 자전거체험센터에서 무료로 빌려 탈 수 있다.
○청풍호반 절경 포인트, 비봉산과 옥순봉
남한강 물길을 막아 생긴 호수인 충주호는 제천에서는 청풍호라고 부른다. 호반 전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은 비봉산(531m) 정상이다. 청풍면 물태리에서 비봉산 정상까지 2.3km 구간을 운행하는 청풍호반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케이블카로 10분 남짓 걸려 정상에 도착하니 사방이 짙푸른 청풍호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넓은 바다 한가운데 높은 섬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호반 주위로 펼쳐지는 풍경은 외국 시골마을의 목가적 장면을 연상케 할 정도로 이국적이다.

정상의 전망대에는 아기자기한 조형물들이 설치돼 있고, 발 딛는 곳곳마다 포토존이 된다. 머리에 전망대를 이고 있는 비봉산은 알을 품은 봉황이 비상하는 모습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제천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신성시해온 산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커다란 새 등에 올라타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청풍호의 또 다른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옥순봉. ‘단양8경’ 중 하나로 유명한 옥순봉은 사실 제천 땅에 속한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조선 명종 때 단양군수로 재직하던 퇴계 이황은 이곳의 희고 푸른 석벽이 마치 대나무 순이 솟은 듯하다고 해서 옥순봉이라고 이름 지었다. 퇴계는 옥순봉에 반해 당시 청풍군수에게 단양으로 넘겨달라고 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퇴계는 옥순봉 석벽에다 단양의 관문이란 뜻인 ‘단구동문(丹丘洞門)’을 새김으로써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옥순봉을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는 출렁다리(길이 222m)인데, 지난해 10월 개통 이후 68만3000명이 찾은 제천의 새 명소다.

옥순봉에 오르기에 앞서 옥순봉 인근 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출렁다리는 빠뜨릴 수 없는 명소다. 지난해 10월 개장한 옥순봉 출렁다리는 길이 222m, 너비 1.5m 규모로 청풍호를 가로지른다. 걸음을 뗄 때마다 전해지는 출렁거림이 아찔할 정도다. 다리를 건너면 약 400m 길이의 생태탐방 덱로드와 야자매트가 깔린 트레킹 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통해서도 옥순봉에 오를 수 있지만 사유지여서 출입이 통제된다.
○신라 화랑들의 수련처 점말동굴

구석기시대 대표적 유적인 제천 점말동굴. 용의 얼굴처럼 생겨 ‘용바위’라고 불리는 이곳에는 신라 화랑들의 흔적도 남아 있다.

제천의 진산인 용두산(871m) 자락에 있는 점말동굴 유적은 남한에서 최초로 확인된 구석기시대 동굴 유적으로 역사 교과서에 자주 언급된 곳이다. 점말동굴은 병풍바위로 불리는 거대 암벽 틈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동굴인데, 중심 동굴 근처에 6개의 가지 굴이 발달돼 있는 형태다. 그 모양새가 용의 눈 혹은 콧구멍과 비슷하다고 해서 ‘용바위’라고 불리는 곳이다. 지금도 샘물이 흐르고 있는 이 유적에서는 구석기시대 동물 화석과 석기 등 다양한 유적이 발견돼 선사시대 생활상 연구에 매우 큰 역할을 했다.

놀랍게도 이곳에서는 신라시대 화랑들의 흔적이 발견됐다. 그 증거가 점말동굴 외벽에 새겨진 80여 자의 각자(刻字)다. 烏郞徒(오랑도), 祥蘭宗得行(상란종득행), 西郞徒陽月(서랑도양월) 등 신라 화랑을 연상시키는 한자들이 대거 발견됨으로써 이곳이 화랑들의 수행처이자 순례지였음을 말해준다. 실제 신라 화랑들은 명당 동굴에서 즐겨 수행을 했다. 경북 영천의 중악석굴은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의 수행처였고, 충북 진천의 장수굴과 강원 통천의 금란굴은 화랑들의 순례지이자 기도처로 활용됐다는 기록도 있다. 실제로 점말동굴은 구석기시대 이후 지금까지도 지기(地氣)가 뻗쳐 나오는 명당 터로 손색이 없다. 즉, 점말동굴은 선사시대 생활 유적이자 신라 화랑들의 신앙 유적이라는 독특한 특징을 보이는 곳이다. 현재 제천시는 점말동굴의 특징을 살려 동굴체험관 건립 등 명소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 외에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대중가요로 유명한 천등산 박달재에서는 조선 중기 박달과 금봉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예술로 표현해놓은 조각상도 유명하다. 성각 스님이 2005년 천년을 살다 죽었다는 느티나무 고목을 가져와 3년 2개월에 걸쳐 고목 내부에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작은 법당인 ‘목굴암’을 완성했는데, 현생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연꽃처럼 피우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불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제천의 마스코트이기도 한 박달과 금봉을 만나는 것으로 제천 여행을 갈무리한다.




글·사진 제천=안영배 기자·철학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