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밥 잘 먹고 잘 웃는데… 나도 우울증?[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입력 | 2022-08-21 07:35:00

‘우울→기쁨’ 반복되는 비전형적 우울증
수면·식욕 문제없어 우울증 자각 어려워
온몸이 무겁고 대인 관계 예민하면 의심
“방치 땐 만성화…조기에 전문가 찾아야”




시종일관 우울감이 지속되는 것을 우울증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즐거워지기도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우울함과 예민함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면 비전형적 우울증을 의심해봐야 한다.

“참을 수 없이 울적한 순간에도 친구들 농담에 웃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허전함을 느끼고, 그러다가도 배가 고파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나 자신이 우스웠다. 지독히 우울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애매한 기분에 시달렸다.” (백세희 에세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중에서)

우울감에 시달리다가도 즐거운 일이 생기면 기뻐하고,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다 그렇게 살지’ 라며 마냥 당연하게 넘길 일만은 아니다. 국가정신건강정보포털에 따르면 성인 10명 중 1명(2019년 기준)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만큼 지속된 우울감을 느낀다고 답할 정도로 우울증은 흔한 증상이 됐다. 특히 잘 자고 잘 웃더라도 혼자 있으면 우울해지고 몸에 힘이 빠진다거나, 다른 사람의 눈치를 과도하게 살피고 있다면 ‘비전형적 우울증’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이런 증상도 우울증인가요?”
20대 회사원 남성 A씨는 2, 3개월 전부터 푹 자고 일어나도 몸이 납덩이처럼 무겁고 팔 다리에 힘이 빠졌다. 출근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져 지각도 자주 한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는 속도가 느려졌고, 친구들은 “요새 말 수가 적어지고 목소리도 작아졌다”고 걱정한다. A씨는 가끔 울적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게임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졌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10시간씩 잠을 자고 식욕도 평소보다 왕성했다. 하지만 갈수록 몸이 땅으로 꺼질 것 같고 피로감이 심해져 뒤늦게 병원을 찾게 됐다.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감기 증상이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듯 우울증 증상도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우울증(주요 우울장애)은 △지속적인 우울감 △식욕·수면 저하 △피로· 무기력 △죄책감 △자살 사고 등의 특징을 보인다. 평소 좋아하던 것을 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 본인이나 주변 사람들이 분별하기 쉽다.

반면 비전형적 양상을 동반한 우울증은 전체 우울증 환자의 3분의 1 정도로 추정되지만, 일반적 양상과 달라 본인과 주변에서 눈치 채기 어렵다. △10시간 이상 과수면 △식욕 증가 △납마비(온 몸이 무겁게 느껴짐) △거절에 대한 과민 반응 등이 특징이다. 행동이 굼떠지거나, 안절부절 못하며 머리카락을 꼬는 등 초조함을 보이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좋은 일이 생기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우울증이라고 의심하기 어렵다.

대인관계 민감한 청소년·청년층이 위험군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비전형적 우울증의 특징 중 하나는 대인 관계에 크게 민감하다는 것이다. 거절을 당하거나 비판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면 급격히 침울해지거나 크게 화를 내기도 한다. 이 때문에 우울증 환자 가운데서도 다른 연령대에 비해 대인 관계에 예민한 청소년과 청년층에서 비전형적 우울증 발병 빈도가 더 높다.

청소년의 경우 평소에 우울하고 예민하다가도 성적이 오르거나 게임 같은 취미 활동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부모나 교사가 알아채기 쉽지 않다. 비전형적 증상 등을 이유로 숨어 있는 청소년 우울증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지난해 질병관리청의 ‘청소년건강행태조사’(5만4848명 대상)에 따르면 일상 생활을 중단할 정도로 심한 우울감에 시달린다고 답한 중·고등학생은 26.8%였다. 그러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0년 10대 우울증 진단 환자는 전체 우울증 환자의 5.7% 수준에 그쳤다.

1인 가구가 많은 청년층은 물리적·심리적 고립감을 느끼기 쉽다. 20대 우울증 환자 수는 2017년 7만6246명에서 2021년 17만3745명으로 해마다 꾸준히 늘고 있다. 최정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부모가 청소년 자녀의 정서 문제를 인지하더라도 ‘나 때는 안 그랬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 청년기까지 정서 문제가 이어진다”며 “조기에 학교 상담교사나 관련 지역 서비스에 적극 연계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가 테스트 5점 이상이면 경미한 우울증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비전형적 우울증은 보편적인 우울증과 다르기 때문에 전문가의 세밀한 진단이 필요하다. 다만 스스로도 우울증인지 헷갈리고, 당장 전문가를 찾기 어렵다면 간단한 자가 테스트로 가늠해 볼 수 있다. 국가건강검진에서 활용하는 우울증 선별 도구인 PHQ-9(Patient Health Questionnaire-9)는 9가지 질문으로 이뤄진 자가보고 검사다. 위 표는 2010년 대한불안의학회 학술지에 실린 연구 ‘한글판 우울증 선별도구(PHQ-9)의 신뢰도와 타당도’를 참고했다.

다만 온라인에 떠도는 근거 없는 우울증 검사는 피해야 한다. ‘나는 내가 가끔 미친 것 같다’ 는 등 과격한 표현은 표준화되지 않은 검사 문항이므로 신뢰할 수 없다.
“방치하면 ‘더블 디프레션’ 위험”

오진승 DF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예민하고 소심해지는 것도 우울증의 증상일 수 있다”며 “가벼운 증상이라도 조기에 치료하면 훨씬 예후가 좋다”고 밝혔다. DF정신건강의학과 제공

긴가민가한 증상 때문에 우울증을 방치하게 되면 2년 이상 우울감이 지속되는 지속성 우울장애로 발전될 수 있다. 증상을 인지했다고 해도 전문의나 심리상담사를 찾기까지 마음의 문턱이 높은 탓도 크다.

‘오늘도 우울증을 검색한 나에게’ 공동저자이자 유튜브 채널 ‘닥터프렌즈’를 운영하는 오진승 원장(DF정신건강의학과)은 “모든 질환은 오래될수록 치료가 어렵기 때문에 조기 대응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더 위험한 것은 일명 ‘더블 디프레션(double depression·이중우울증)’이다. 오 원장은 “지속성 우울장애를 쭉 가지고 있다가 심한 우울감이 2주 이상 지속되는 주요 우울장애가 겹치는 ‘더블 디프레션’이 온 환자들은 상당한 고통을 호소한다”고 말했다.

증상이 심각하다면 약물 치료를 고려해야 한다. 항우울제는 세토로닌, 노르에피네프린 등 신경전달물질 분비를 조절해 우울감 해소에 도움을 준다. 오 원장은 “정신과 약을 먹으면 머리가 멍해진다거나 중독 될 것이라는 오해가 많다”며 “의사 처방대로 복용한다면 중독이나 내성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증상이 완화되더라도 6~9개월 정도는 유지 치료를 위해 약을 더 복용해야 한다.

증상이 심하지 않고 약물 치료에 거부감이 느껴진다면 가까운 곳에 있는 심리상담센터나 시·군·구 단위로 설치된 정신건강복지센터 등에서 검사와 상담을 받는 것도 좋다. 오 원장은 “‘이 정도도 우울증인가?’ 하고 무시하기 보단 내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다면 일단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며 “가벼운 증상일수록 쉽고 빠르게 호전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일상 생활에서 우울감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무엇이 있을까. 오 원장은 “몸에 좋은 것이 마음에도 좋다”고 했다. 일찍 자고, 제때 먹고, 금주와 운동을 생활화하라는 것이다. 오 원장은 “밤늦게 깨어 있으면 우울감이 심해지고 늦잠을 자게 돼 생활 리듬이 깨진다”며 “10시간을 자더라도 정신적 피곤은 풀리지 않기 때문에 무기력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했다. 이어 “운동은 항우울제 만큼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많다”며 “30분씩이라도 일주일에 3회 이상 시도해보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