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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가난의 벽을 뚫는… 그것은 무한한 희망[책의 향기]

입력 | 2022-06-18 03:00:00

◇퀀텀 라이프/하킴 올루세이 등 지음·지웅배 옮김/424쪽·1만8000원·까치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바라본 지구. NASA 제공


100명 중 3명. 2020년 미국 물리학 전공자 중 흑인 비율이다. 1999년에는 이 비율이 4.8%였다. 약 20년간 전체 물리학 전공생 수는 늘었지만 흑인 비율은 도리어 줄었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는 올 3월 과학계의 인종차별을 지적하면서 이 수치를 공개했다.

흑인인 저자는 ‘흑인이 백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려면 두 배는 더 똑똑해야 한다’는 과학계 인종차별을 비롯해 학대, 가난으로 얼룩진 유년 시절을 딛고 천체 물리학자가 됐다. 하루 한 끼 먹기도 어려운 미국 남부 빈민가에서 자란 그에게는 맥도널드가 생일날 가는 고급 레스토랑이었고, 집에 수도 배관이 없어 펌프로 물을 퍼야 했다. 폭력과 범죄가 일상이던 빈민가에서 태어나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교수로, 그리고 미국항공우주국(NASA) 과학임무국에 근무하는 유일한 흑인 물리학자로 거듭난 과정이 담겼다.

저자의 삶은 ‘이보다 더 바닥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다. 지독한 가난보다 더 지옥 같았던 것은 가정폭력이었다. 아빠가 엄마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엄마는 아빠가 누워 있던 침대에 불을 지르는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네 살 아이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강박적으로 숫자를 세는 버릇을 갖게 됐다. 대마초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엄마를 대신해 그는 대마초를 포장했다. 어렸을 때부터 접했던 마약은 성인이 된 그를 마약중독자로 이끌었다. 투갈루대 재학 시절 그는 대마초를 판 돈으로 코카인을 샀다. 36시간 동안 쉬지 않고 코카인을 흡입할 정도로 중독은 심각했다.

마약중독자 대학생으로 위태롭게 살아가던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 물리학과 교수 아서 워커와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소수자를 뽑는 다양성 전형을 통해 스탠퍼드대 대학원 물리학과에 입학했지만 여전히 마약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에게 워커는 “앞으로 다신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신뢰와 위로의 말을 건넨다. 워커와의 면담 뒤 그는 재활프로그램에 들어간다. 매일 밤 코카인을 갈망할 때마다 그는 워커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이후 아서의 연구진이 된 그는 망원경을 통해 태양 표면을 덮은 코로나 고리, 화염 등을 세밀히 담은 이미지를 얻는 방법을 함께 연구해 성공했고 논문의 공저자가 됐다.

빈민가의 흑인으로 태어난 하킴 올루세이는 인종차별, 마약중독, 가정폭력을 견뎌내고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가 됐다. 저자는 아프리카의 차세대 우주 과학자들의 교육을 돕는 일에 뛰어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천문학과 학생들을 멘토링하기도 했다. 사진 출처 하킴 올루세이 페이스북 

기댈 곳 없는 외톨이였던 그를 지탱해준 또 다른 버팀목은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지식에 대한 갈증으로 유년 시절 백과사전 22권을 완독한 그에게는 ‘교수님’이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지능지수(IQ) 162로, 백과사전에서 접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매료돼 고등학교 때 상대성이론을 시연하는 컴퓨터 게임을 제작해 과학전람회에서 대상을 타기도 했다. 스탠퍼드대 재학 시절 백인 학생들의 은근한 무시에도 굴하지 않고 매일 도서관에서 밤을 새웠다.

양자역학에는 터널링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있다. 거시 세계에서는 결코 통과할 수 없는 벽을 미시 세계에서의 입자가 뚫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자신의 삶을 터널링에 비유한다. “나의 삶은 마치 새로운 벽을 마주해서 반대 방향으로 강하게 튕겨 나가면서도 결국은 벽을 통과하는 데 성공하는 진동 패턴과도 같았다.” 자신은 운명이 결정돼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 그리고 말한다. “우주는 광활하다. 그러나 무한하지는 않다. 유한하다. 내가 관측한 것 중에 무한에 가장 가까운 것은 바로 희망이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