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5·18민주화운동] 〈중〉 박관현 열사의 ‘들불야학’
박관현 열사(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와 박용안 씨(뒷줄 왼쪽) 등 전남대 사회조사연구회 동아리 회원들이 1979년 늦여름 전남 영암군 월출산으로 산행을 가 촬영한 사진이다. 박 열사는 사회조사연구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박용안 씨 제공
1978년 12월 21일 목요일 밤. 광주 서구 광천동 시민아파트 주변 광천삼화신협의 안쪽 방으로 대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박관현 열사(전 전남대 총학생회장·1982년 작고)와 신영일 열사(1988년 작고)를 비롯해 박용안, 장석웅, 이세천, 박병섭, 안진, 김정희, 최금표, 위승량 씨 등이었다.
이들은 당시 광천동에 있던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를 위한 예비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대학생은 아니었지만 윤상원(1980년 작고), 김영철 열사(1998년 작고)도 참석했다. 윤 열사는 당시 “김영철 씨는 시민아파트 A동 반장이자 마을 지도자입니다. 광천삼화신협 실무를 맡고 있고 광주YWCA 신협에도 근무하고 있는 팔방미인”이라고 소개했다.
박 열사는 들불야학 식구들을 이렇게 처음 만나 학생운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들불야학은 1978년 7월 결성돼 노동자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들불야학의 ‘민주·희생·인권’의 정신은 5·18민주화운동에 이어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이끌며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됐다.
박 씨가 회고하는 박 열사는 키 167cm, 몸무게 70kg 정도의 다부진 체격이었다. 소탈하지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고 한다. 광주 동구 계림동에서 자취를 하면서 들불야학이 있던 광천동 시민아파트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박 열사는 전남대 법대에 들어가기 위해 3수를 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입학한 터라 같은 학번 신입생보다 나이가 많았다. 박 씨는 “박 열사가 사법시험을 준비해야 하는지, 시민운동에 참여해야 하는지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실태조사는 239만 m² 터에 자리 잡은 63개 업체를 돌아다니며 이뤄졌다. 박 열사는 처음 보는 업체 사장이나 간부는 물론 노동자에게 살갑게 다가가 구수하게 말을 걸었다. 박 열사의 친근한 모습에 대부분 마음을 열었다고 한다.
노동자 299명의 설문을 토대로 보고서가 완성됐고, 1979년 5월 ‘전대신문’에 ‘광주공단 전체 노동자 50% 이상이 최저임금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22%가 주 60시간 이상 노동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박 열사는 노동자 실태조사를 계기로 공부보다는 현실 참여를 택했다. 1979년 3월 전남대 사회조사연구회 창립을 주도했고 한 달 뒤에는 윤상원 열사의 권유로 들불야학에서 영어, 수학을 가르쳤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들불야학 식구들의 격려 등에 힘입어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당선했다. 5월 14일부터 사흘 동안 전남도청 앞 등에서 5·18의 씨앗이 된 ‘민족민주화 대성회’를 이끌었다.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박 열사는 5·18 진상 규명을 위해 40여 일 동안 단식을 하다가 1982년 10월 29세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박 열사의 신념은 1980년대 한국 학생 운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광주의 아들’ 박 열사의 뜻을 계승하기 위한 추모 사업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법적 명예 회복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박 열사는 숨진 지 40년이 흘렀지만 유죄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유족은 고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재심을 청구했으나 법원은 2013년 “박 열사가 항소 도중 숨져 현행법상 재심 청구 대상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박 열사의 셋째 누나 박행순 씨(73)는 “올해부터 영광군에서 생가를 보전하는 사업에 착수한다”며 “동생의 법적 명예 회복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