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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소녀의 죽음[횡설수설/이정은]

입력 | 2022-03-02 03:00:00


“아이를 어서 옮겨! 살릴 수 있어!” 의료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구급차를 울렸을 때 소녀의 눈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몇 번의 심폐소생술도 소용없었다. 옆에 있던 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된 두 손을 떨면서 흐느꼈다. 끝내 숨을 거둔 6세 소녀의 몸을 덮어줄 것은 피로 얼룩진 그의 분홍색 재킷뿐. 철제 간이침대 위에 드러난 두 발은 너무 작았다.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사망한 우크라이나 소녀의 죽음이 전 세계를 분노와 슬픔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 소녀의 마지막을 지켜본 외신의 보도와 사진들은 실시간으로 타전됐다. 울분에 찬 의사들이 “이 사진을, 이 아이의 눈빛을 푸틴에게 보여주시오”라고 비장하게 쏘아붙인 내용까지. 유니콘이 그려진 파자마 차림의 소녀는 엄마 아빠와 슈퍼마켓에 다녀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유엔의 고위 당국자는 이 사진들을 보고 “위장이 뒤집힌다”고 했다.

▷러시아의 공격으로 사망한 우크라이나 민간인 102명 중 어린이 희생자는 16명. 수도 키예프에서는 러시아군이 쏜 총에 맞아 10세 여학생이 숨졌다. 어린이 부상자는 45명으로 집계됐지만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키예프 북동부 지역에서는 유치원 근처에 집속탄이 떨어졌다. 100개 넘는 국가가 집속탄금지협약까지 만들어 금지한 치명적 살상무기가 어린이와 민간인의 목숨을 위협한 것이다.

▷무고한 희생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힘은 강력하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는 ‘유니콘 파자마 소녀’의 사진과 함께 “푸틴은 살인자” “전쟁범죄로 처벌하라”는 글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전 세계 곳곳의 반전 시위도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2015년 시리아 내전 당시에는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세 살배기 알란 쿠르디의 사진 한 장이 지구촌의 심장에 불을 붙였다.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이 장악한 카불공항에 홀로 남겨진 채 플라스틱 바구니 안에서 울고 있는 어린 아기의 사진이 여론을 움직였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내 아이, 내 가족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며 총을 집어 들고 있다. 피란길에 오른 한 소년이 울음을 꾹 참으며 “아빠는 군인 영웅들을 돕기 위해 혼자 남았다”고 말하는 인터뷰는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결사항전에 나선 이들의 비장한 표정은 문득 100여 년 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우리의 장삼이사들과도 겹친다. “고통받는 만큼 이겨낸다”며 일제에 맞섰던 17세 소년, 27세 이발사의 결기가 다르지 않다. 3·1운동으로 독립운동에 불을 붙였던 이들은 평범한 일반인과 어린 학생들이었다. 전쟁과 침략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나라의 운명을 바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슬프고도 위대한 아이러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