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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송평인]부다페스트 메모랜덤

입력 | 2021-12-10 03:00:00


1994년 12월 5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미국 러시아 영국 대표가 모였다. 이들은 옛 소련의 핵무기를 분산해 갖고 있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등 세 나라를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시키기 위한 문서에 서명했다. NPT 가입의 대가로 이 나라들이 무력침공을 받을 경우 안보를 보장한다는 약속이 들어갔다. 서명 직후 유엔에 제출된 이 문서가 바로 부다페스트 메모랜덤(memorandum)이다.

▷당시만 해도 우크라이나는 미국 소련 다음으로 핵무기를 많이 보유한 나라였다. 물론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갖고만 있었을 뿐 핵무기 발사를 위한 코드 등은 러시아가 통제하고 있었으니 온전한 의미에서의 핵무기 보유국은 아니었다. 이런 이유도 있고 해서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을 믿고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겼다.

▷우크라이나가 자국의 안보를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할 움직임을 보이자 러시아가 10만 명에 가까운 군 병력을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집결시켰다. 러시아가 내년 초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은 러시아를 향해 강력한 경제제재를 경고했지만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파병하는 데는 선을 그었다.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병합했을 때에 이어 다시 한번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이 종잇조각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메모랜덤의 약자가 흔히 말하는 메모다. 물론 외교적 메모랜덤은 메모이긴 해도 개인이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쓰는 메모와는 다르다. 거기에는 서명한 국가들의 약속이 들어있다. 다만 메모랜덤은 의회의 비준을 필요로 하는 조약(treaty)이나 협정(agreement)과는 달리 법적 구속력을 피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형식이다. MOU(memorandum of understanding·양해각서)처럼 조약이나 협정으로 가기 위한 전(前) 단계로서 작성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주요 메모랜덤으로는 구한말의 가쓰라-태프트 메모랜덤이 있다.

▷국가 간의 조약이나 협정은 당사국의 의회가 비준했기 때문에 조약이나 협정의 불이행은 의회의 의사를 존중하는 국내 세력에 의한 반발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메모랜덤은 그런 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메모랜덤은 약속을 불이행하는 국가가 불이익을 받게 할 만한 지렛대가 있을 때는 실효성을 갖는다.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넘겨주는 순간 그 지렛대를 잃어버렸다. 따져보면 조약이나 협정조차도 그것을 강제할 기관이 없는 국제사회에서는 무시될 리스크를 안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처한 곤경은 국제 질서의 냉엄한 현실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