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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 된 탈북 IT맨 “생계 이끈 아내덕 합격”

입력 | 2021-12-03 03:00:00

이강씨, 국민銀 동반성장 전형 합격
“식당일 하며 수년째 뒷바라지 해줘”
컴퓨터 없어 주말 PC방 등서 공부
다문화 高3 김선미양도 합격 눈물



1일 서울 영등포구 KB국민은행 휴게실에서 최근 ‘ESG 동반성장 전형’ 채용으로 합격한 김선미 양(가운데), 이강 씨(왼쪽), 신은영 씨가 모였다. 국민은행은 올 하반기 채용에 처음으로 다문화가족 자녀, 탈북자, 기초생활수급자를 별도로 뽑는 전형을 만들었다. KB국민은행 제공


“여보, 이제 식당 일 그만해도 돼.”

지난달 25일 오후 6시, KB국민은행 채용 결과가 발표되자 이강 씨(35)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내에게 합격 소식을 알렸다. 취업 준비를 하는 탈북자 남편을 대신해 아내는 몇 년째 식당 일을 하며 생계를 책임졌다.

이 씨는 북한에서 4년제 공대를 졸업하고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일한 인재다. 2017년 북한을 떠나 한국에 온 뒤 중앙대 응용통계학과에도 입학해 졸업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가뜩이나 좁아진 채용문에 탈북자라는 배경까지 겹쳐 취업이 쉽지 않았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 북한 사투리를 고치려고 20만 원짜리 발음 교정 수업까지 받았다.

그러다 국민은행의 채용 공고가 눈에 띄었다. ‘북한이탈주민’ 전형은 절호의 기회였다. 국민은행은 올 하반기(7∼12월) 채용에 처음으로 ‘ESG 동반성장 전형’을 만들었다. 기존 보훈, 장애인, 특성화고 전형에 다문화가족 자녀, 탈북자, 기초생활수급자 전형을 신설해 별도로 뽑기로 한 것이다.

이번에 이 씨를 비롯한 탈북자 5명, 다문화가족 자녀 5명, 기초생활수급자 5명이 각각 계장급으로 채용됐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가산점을 주는 게 아니라 별도의 인원을 배정해 이들을 채용한 건 금융권 최초”라며 “다양한 계층의 채용을 통해 은행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고 했다.

2008년 한국에 온 탈북민 신은영 씨(37·여)도 서울대에서 석사까지 마치고 2년간 미국 유학을 다녀왔지만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신 씨는 국민은행 공고가 난 날부터 마감 직전까지 자기소개서를 고치고 또 고쳤다. 자기소개서의 ‘가장 힘들었던 경험’에는 이렇게 썼다. “고등학생 때 북한을 혼자 떠나 중국에서 불법체류자로 2년을 살다가 한국에 오니 힘든 일이 없습니다. 바라던 기업에서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베트남인 어머니를 둔 고등학교 3학년 김선미 양(18·여)은 다문화가족 자녀 전형으로 합격했다. 합격 소식을 듣고 김 양은 버스 안에서 엄마와 전화하며 펑펑 울었다. 김 양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일찌감치 대학 대신 취업으로 눈을 돌렸다. 집에 컴퓨터가 없어 방과 후 학교에 혼자 남거나 주말 PC방에서 1000원을 내고 워드프로세스 등을 공부했다.

김 양은 은행 업무가 익숙해지면 퇴근 후 시간을 이용해 대학 입시 공부를 해볼 계획이다. 언젠가 은퇴 자산을 관리해 주는 전문가가 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김 양은 “다문화가정이 점점 늘고 있는데 ‘다문화가정 자녀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 씨도 “탈북자 특별전형이 없어지지 않도록 책임감 있게 일할 것”이라고 했다.

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