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장 전역식 모습. 오른쪽은 김옥숙 여사. 1981.7.15 동아일보 DB
노태우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이들 한국 정치의 역사적 사건은 지금도 국민들의 뇌리에 생생할 만큼 충격의 연속이었다.
신군부 세력의 핵심 중 하나로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한 그는 숱한 정치적 위기를 거친 끝에 육사 11기 동기인 전두환 전 대통령에 이어 1988년 제13대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육사 생도 시절 (증명사진). 동아일보DB
제9사단장에서 대통령까지
1982년 10월 27일 국회 내무위에서 답변에 앞서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는 노태우 내무장관(왼쪽)과 안응모 치안본부장(오른쪽).
1985년에는 2·12 총선에서 전국구로 국회에 진출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으로 활동하며 사실상 ‘후계자’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에 대한 거부감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분노와 어우러졌고 민심은 극도로 이반됐다.
6·29 선언 직후 미국 ‘타임지’ 표지모델로 선정된 노태우 전 대통령. 동아일보DB
온건 군부세력의 이미지를 구축한 그는 그해 12월16일 16년 만에 실시된 대통령 직접선거에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해 야권이 통일민주당 김영삼,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로 분열된 상황에서 36.6%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승부수 띄운 ‘3당 합당’
198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 개막을 축하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 동아일보DB
노태우 정권은 정계개편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퇴임 후의 신변 보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4000억 원 비자금
1996년 12월 16일 쿠데타 및 비자금 항소심 재판. 동아일보DB
검찰은 수사 착수 2주일 만에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노 전 대통령을 소환 조사했고 결국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혐의로 구속했다. 그는 군 형법상 내란 혐의 등으로도 기소됐고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 원의 형이 확정됐다.
그는 1997년 12월18일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 조치에 의해 석방됐다. 2013년 9월에는 남은 230억 원의 추징금을 모두 납부하면서 16년을 끌어온 미납 추징금 논란을 마무리 지었다.
그는 옛 권위주의 군부 체제의 일원이었고 불법 비자금 조성으로 처벌받으면서 비판을 받았다. 재임 시절 ‘보통사람’을 내세웠지만 이른바 ‘물태우’로 표현되는 유약하고 소극적인 리더십에 대한 불만도 나왔다.
기나긴 투병생활
테니스를 즐기던 노태우 전 대통령. 오른쪽 사진은 1991년 7월 2일 한미정상회담을 가진 뒤 백악관 테니스 코트에서 부시 대통령과 한조가 돼 테니스를 치는 모습. 동아일보 DB
2002년 미국에서 전립샘암 수술을 받았고, 2008년에는 희귀병인 소뇌 위축증 판정을 받았다. 2011년 4월 엑스선 검사에서는 7cm 길이의 한방용 침이 기관지를 관통한 것으로 드러나 제거 수술을 받은 바 있다.
그는 2011년 8월 회고록을 통해 “19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선거자금으로 3000억 원을 줬다”는 내용을 밝히면서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가급적 정치 현안에 대해선 말을 아끼면서 국민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가는 길을 선택했다. 2015년 11월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 장례식장에 아들 노재헌 씨를 보내 조의를 표하기도 했다. 재헌 씨는 올 8월 광주 5·18민주묘지를 찾아 광주민주화운동 희상자들에게도 적극적인 사죄의 뜻을 표하는 등 꾸준히 과거사에 대한 정리 작업을 해 왔다.
일각에선 노 전 대통령 주도의 직선제 도입으로 우리나라가 군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되는 계기가 마련됐고,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하는 등 탈냉전 시대를 맞아 적극적으로 북방정책을 펼친 점은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