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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전쟁 직전, 나치 독일은 관광객으로 넘쳐났다

입력 | 2021-09-25 03:00:00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줄리아 보이드 지음·이종인 옮김/688쪽·3만3000원·페이퍼로드



1930년 독일 바이에른주 오버아머가우를 찾아 수난극을 관람한 ‘자동차 왕’ 헨리 포드(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 선전을 위해 이 수난극을 독일 전역에서 상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페이퍼로드 제공


1930년 독일 바이에른주 오버아머가우(Oberammergau)를 찾은 포드 창립자 헨리 포드(1863∼1947)는 그리스도 최후의 날을 묘사하는 오버아머가우 수난극을 관람한다. 이 연극은 ‘그리스도의 살해자’인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나치의 프로파간다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었다. 반유대주의자였던 포드는 이 연극에서 받은 감동과 기쁨을 표시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연기한 연극배우 안톤 랑에게 자동차를 한 대 선물하겠다며 뮌헨에 가서 그가 좋아하는 차를 고르도록 했다. 서정시 ‘기탄잘리’로 유명한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는 수난극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직접 영어로 ‘어린아이’라는 장시를 지었다.

나치 독일을 떠올리면 수용소와 인종청소, 히틀러의 끔찍한 만행 등이 연상되기 마련이다.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다양한 분야의 학문과 예술이 꽃피운 여행지, 관광지로서의 독일은 쉬이 상상하기 어렵다. 이 책은 히틀러의 만행이 본격화하기 전인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 독일을 찾았던 학생, 정치인, 음악가, 외교관 등 여행자들의 기록을 모아 매력적이었던 당시 독일의 모습을 조명한다. 저자는 여행자들의 시선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을 다시 들여다봤다.

당시 독일은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마르크화 가치가 폭락해 외국인 입장에서는 숙박비와 식비까지 저렴한 나라였다. 1930년대 독일을 찾는 미국인은 연간 50만 명에 육박했다. 유럽 여행이라는 모험을 최대한 즐기기 위해 대다수 미국인은 정치적 문제들을 불청객 취급하며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영국인 관광객들에게도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라는 사실보다도 지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국가라는 이미지가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

나치 독일의 선전이 치밀하고 논리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책에 따르면 오히려 당시 나치의 선전은 영토에 대한 야욕과 전쟁에 대한 야망을 그다지 숨기지 않았다. 독일 밖의 언론들은 나치와 히틀러의 야욕을 경계하며 이들을 비판하는 기사를 연일 실어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독일이 그토록 많은 여행자에게 매력적인 땅으로 느껴졌던 이유에 대해 저자는 “사람들은 실제보다는 믿고 싶은 것을 믿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나치 독일 비판 기사를 보더라도 사람들은 “신문이란 게 원래 별것 아닌 일도 대단한 사건처럼 떠들어댄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 같은 마음이 결과적으로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도록 그들에게 돈과 시간을 벌어다 줬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여행자들 가운데는 작가 사뮈엘 베케트,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 생리학자이자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 등 유명인사들도 포함돼 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조차 시대의 전체 모습을 조망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에 벌어지는 일의 진상을 파악하고, 나치 당국의 프로파간다에 넘어가지 않으며, 더 나아가 유대인 대학살을 예견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같은 저자의 통찰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현재 무엇을 조망하지 못하고 있는지 성찰하게 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이렇게 설명한다. “황당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고, 아주 사소한가 하면, 아주 비극적인 내용”의 책이라고.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