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의 정체는 올해 1월 문을 연 내추럴와인바 ‘하리’. 하리를 운영하는 정종혁 씨(31)는 “캄캄한 거리를 밝히는 가게 내부 불빛 자체가 간판이라고 생각해 외벽을 통유리로 만드는 대신 간판을 달지 않았다”며 “간판이 없으니 오히려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인터넷으로 검색한 뒤 더 많이 찾아온다”고 했다.
●일자리 잃은 영업사원 ‘간판’
지금까지 간판은 가게의 얼굴이자 ‘무언의 영업사원’으로 불렸다. 지나가는 이들에게 가게의 정체를 알리고 이들을 가게로 이끄는 판촉물이었던 것. 간판 활용은 장사의 기본이었다.
삼각지역 일대 또 다른 내추럴와인바 ‘음(Mmm)’의 경우 간판이 없는 것에 더해 꽃가게 위 2층에 정체를 숨기고 있다. 1층 출입문에도 안내문이 전혀 없다. 가게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 애쓴 듯한 모습. ‘음’을 운영하는 권은지 씨(34·여)는 “우리 가게를 알고 좋아하는 사람만 찾아와 와인을 즐겼으면 하는 생각에 간판을 달지 않았다”고 “손님들에게 ‘나만 아는 공간’의 매력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MZ세대 “간판 없어도 괜찮아”
숨은 맛집을 SNS 검색을 통해 어렵게 발견한 뒤 ‘나만의 아지트’로 삼고 싶어 하는 MZ세대의 특성도 간판 없는 가게의 확산을 부추긴다. 이승윤 건국대 경영학부 교수(디지털 심리학자)는 “MZ세대 고객들과 SNS를 영업에 활용하는 MZ세대 주인들이 결합하면서 간판을 달지 않는 추세는 더 확산될 것”이라고 했다.
●맛 자신감-워라밸 중시도 한몫
간판 없이도 맛과 분위기로 승부를 낼 수 있다는 MZ세대의 자신감도 간판을 떼게 하는 원인이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간판 없는 가게’는 간판이 없는데다 가게 이름까지 ‘간판 없는 가게’다. 호텔 셰프 출신 등 1988년생 친구 3명이 뜻을 모아 2017년 문을 연 이 레스토랑은 익선동 대표 맛집으로 소문 나 늘 손님들이 줄을 서있다. 이 가게 주인 정종욱 씨는 “음식이 맛있으면 그 가게가 산골짜기에 있어도 손님이 찾아온다고 생각했다”며 “음식과 맛이라는 본질에 집중하고 싶어 간판을 달지 않았다”고 했다.
이은용 경희사이버대 호텔·레스토랑경영학과 교수는 “MZ세대 주인들도 간판이 없으면 개업 초창기 고객 확보가 어렵다는 걸 잘 알 것”이라며 “그럼에도 간판을 걸지 않는 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을 하며 자아실현을 하면서도 워라밸을 지키겠다는 MZ세대의 명확한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