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대통령 피살, 무슨 일이 “美마약단속국 요원” 이라며 침입…美국무부 “사실 아니다” 개입 부인 아이티 경찰, 4명 사살 2명 체포…승계 1순위 대법원장, 코로나 사망 총리 “권한대행” 선언… 계엄령 선포
7일 무장한 아이티 경찰이 이날 새벽 괴한들의 총격에 암살당한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의 사저 주변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경찰들 뒤로 모이즈 대통령이 연설하는 모습이 그려진 벽화가 보인다. 포르토프랭스=AP 뉴시스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의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53)이 7일 새벽 사저로 들이닥친 무장 괴한들에게 암살당하면서 이 나라가 극심한 정치적 혼돈에 빠져들게 됐다. 경찰이 이날 암살 용의자들을 사살하거나 체포했지만 이들의 정체나 배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괴한들이 들이닥친 대통령 사저 담장 곳곳에 총알 자국이 나 있다. 포르토프랭스=AP 뉴시스
아이티 당국은 이날 암살범의 신상이나 배후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들이 “외국인들”이라고 밝혔다. 앞서 정부 당국자도 “암살범들은 고도로 훈련된 외국 용병”이라고 설명했다. 암살범들은 아이티 공용어인 프랑스어가 아닌 스페인어와 영어를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국은 또 이들이 미국의 마약단속국(DEA) 요원 행세를 했지만 그럴 리는 없다고 설명했다.
미 국무부도 그럴 가능성을 부인했다. 이날 임시로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겠다고 밝힌 클로드 조제프 총리는 AP통신에 “암살사건에 대한 국제적 차원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2017년 취임한 모이즈 대통령은 야권과 극렬하게 대립해 왔고, 올 들어 이들의 반감이 더 커진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이번 사건은 정치적 동기에 의한 소행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바나나 수출업자 출신인 그는 처음에는 인지도가 낮은 정치 신인이었다. 그러나 아이티의 변화와 빈곤 탈출을 기치로 정치적 입지를 빠르게 다지며 2015년 10월 대선 예비선거에서 33%의 득표율로 1위를 했다. 하지만 부정선거 논란에 휩싸였고 선거는 무효가 됐다. 2016년 11월 다시 치러진 대선에서 득표율 55%로 다시 당선됐다.
야권과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진 것은 올 2월이었다. 야권에서는 전임 대통령이 물러난 2016년 2월 이후 5년이 지났기 때문에 모이즈 대통령 임기가 끝났다고 주장했다. 반면 모이즈 대통령은 실제로 취임한 2017년 2월부터 계산해야 하기 때문에 임기가 아직 1년 남았다고 맞섰다. 그는 그러면서 자신을 암살하고 정권을 전복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는 혐의로 야권을 지지하는 대법관을 비롯해 20여 명을 체포하기도 했다.
취임 후 그의 통치 스타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우선 많은 중남미 국가들처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칙령을 남발하고, 반정부 세력을 탄압하는 독재 행보를 보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편으로는 그간 변화를 가로막던 기득권과 대립하면서 아이티의 진정한 개혁을 추진한 지도자라는 평가도 있다.
과거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아이티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독재 정권이 들어서고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 또 국민의 60%가 빈곤 상태에 빠진 데다 2010년 대지진 등 대규모 자연재해가 빈발하고 권력자의 부패도 심각한 나라다.
조제프 총리는 이날 긴급 각료 회의를 통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신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아이티의 국경이 폐쇄되고 질서 유지를 위해 군경이 즉각 투입됐다.
아이티는 사실상 ‘권력 진공’ 상태에 놓이면서 극심한 혼돈에 빠져들 가능성이 커졌다. 당장 정부 내에서 대통령직을 누가 승계할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CNN방송 등에 따르면 아이티에서는 대통령 유고 시 대법원장이 이를 승계하는데, 르네 실베스트르 대법원장은 얼마 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사망했다.
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