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파묻힌 아이’ 닷지 역 손병호 아내-아들 사이 태어난 생명 죽이고 30년 뒤 자신의 죄 고백하며 속죄 “가정 지키려는 가장… 복합적 인간상” 데뷔작 ‘성극’부터 악역 맡아 열연 TV-무대 오가며 악한 연기 선뵈지만 유쾌한 입담에 ‘예능 블루칩’ 조명
극 중 ‘닷지’ 역할로 분장한 손병호의 모습. 어딘가 괴이하고 섬뜩한 캐릭터를 표현했다. 경기아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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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상간, 살인, 매장….
연극 ‘파묻힌 아이’에서는 차마 입에 담기 꺼려지는, 상상조차 버거운 일들이 1970년대 미국의 한 가정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어머니 ‘핼리’와 첫째 아들 ‘틸든’의 충동적 관계로 태어난 한 아이. 이 생명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집안의 가장 ‘닷지’는 아이를 죽여 뒷마당에 매장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흘려보낸 30년. 외부인 ‘셸리’가 이 가정을 방문하면서 가족들은 비로소 쓰디쓴 진실과 마주할 상황에 놓인다. 세상은 과연 이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줄까.
비극의 정점에 선 닷지는 죄를 범하고, 끝내 고백하는 인물. 타고난 이야기꾼, 배우 손병호(59)가 배역을 맡아 끔찍한 서사를 펼쳐낸다. 21일 경기 수원시 경기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40년차 악역 전문 배우’답게 “대본을 보자마자 재밌을 것 같았다. 해석, 연기에 따라 참담한 비극 또는 희비극이 될 수도 있는 여지가 있어 매력적”이라고 했다. 이어 “출연료까지 제대로 받으면서 꿈꾸던 작품에 설 수 있으니 진짜 감사한 일”이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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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경기 수원시 경기아트센터에서 만난 손병호는 “변신은 늘 행복하다”고 했다. 특히 “극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나를 본 사람들이 ‘아까 그 역할이 너였냐’고 할 때마다 짜릿하다”고 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현실에서도 수많은 비극이 속보로 쏟아지는 시대. 굳이 무대 위에서도 우리가 이 이야기를 봐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는 “현실 속 ‘정인이 사건’이든 극 중 영아 유기든 인간성 말살의 핵심에는 자본주의의 폐해가 있다. 돈 앞에선 가족도 해체되고 도덕과 규범도 쉽게 묻어버리는 게 현실”이라고 짚었다. “비극의 끝까지 치달아봐야 화해도 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81년 극단 ‘거론’을 시작으로 ‘목화’에서 줄곧 무대에 올랐던 그는 첫 작품인 성극(聖劇) 무대를 떠올리며 “이상하게 그때부터 악역이었다”고 털어놨다. 이후 연극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블루사이공’ 등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척하지 말자”는 게 그의 연기 지론. 다만 “정답은 없기 때문에 10명 중 7명이 연기에 공감하면 잘하는 게 아니겠냐”고 답했다.
짐승 같은 연기를 벼르는 그는 사실 무대 밖에선 누구보다 유쾌한 이야기꾼이다. 넘치는 끼와 에너지를 발산하는 긍정적 모습이 조명 받으며 ‘예능 블루칩’으로도 통했다. 스스로 “광대 역할은 배우인 제 삶의 목적이자 이유”라고 했다. 그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모두가 즐거워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다고 털어놨다. “국민적 술자리 게임이 된 ‘손병호 게임’도 그래서 탄생한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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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