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얼마 전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때 아닌 고향 논쟁이 발생했다. 우리는 모두 서울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들이었고, 고향도 각자 달랐다. 술자리가 무르익었는데 평소에도 고향 묻는 걸 좋아하는 한 친구가 옆 친구에게 물었다. “그럼 넌 전주에서 태어난 거야?” “전주에서 태어났는데 두 살 때 아버지 직장 때문에 충남 부여로 이사를 갔다가 거기서 6학년 때까지 살았고, 중학교에 가면서 다시 전주로 왔어.” “그럼 전주가 고향이 아니네. 전주에서 산 것보다 충남 부여에서 산 날이 더 많잖아.” “그래도 전주에서 태어나고 중고등학교를 전주에서 다녔으니까 고향은 전주지.” “대학은?”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고, 군대 제대한 다음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고 있지.” “그럼 서울에서 산 기간이 더 많네. 그런데 왜 고향을 전주라고 해?” “어릴 때 살던 곳이니까 고향이라고 하는 거지. 그럼 너는?”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나는 충북 보은에서 살았는데, 우리 고향에 댐이 들어오면서 고향이 수몰지구가 됐어. 그래서 일곱 살 때 대전으로 이사를 했어. 그리고 대전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지.” “그런데 넌 왜 맨날 고향이 대전이라고 하냐. 충북 보은이면서?” “대전에서 더 오래 살았으니까 대전이 고향이지.” “오래 산 걸로 치면 서울에서 더 오래 산 거 아냐?” “오래 살긴 서울에서 오래 살았지. 그래도 고향은 대전이야!”
해석이 분분하겠지만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 고향이라는 말이 가장 와 닿았다. 태어난 곳이 아닌, 그립고 정든 곳을 물어본다면 지역 감정보다는 추억을 먼저 떠올릴 수 있을 테니까. 오늘은 서울에 처음 와서 자취하던 신월동 언덕길이 생각난다. 아는 사람 한 명 없었는데 3년간 살다 보니 단골 식당도 생기고 단골 서점도 생겨서 많이 의지하고 위안이 됐던 곳, 신월동 청기와 주유소 앞 동네.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