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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례시로 지정된 수원, 정조가 꿈꾼 최고의 신도시로 부활하나[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입력 | 2020-12-27 09:00:00

풍수로 설계한 조선의 계획도시 수원화성
정조는 뛰어난 군주이자 최고의 풍수지리가
산의 얼굴에 자리한 화성행궁, 산의 뒷면에 배치한 경기지사 관저




정조 임금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개최한 곳으로 유명한 화성행궁의 봉수당. 수원=안영배 논설위원.

인구 125만 명인 수원시가 곧 ‘수원특례시’로 변신한다. 이달 초 수원을 특례시로 지정하는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으로써 수원시는 2022년부터 새 이름을 갖게 된다. 특례시는 인구 100만 명을 넘어선 도시 가운데 기초자치단체 지위를 유지하면서도 광역시급 위상의 자치권한과 재량권을 행사하는 도시를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도시의 급이 한 단계 올라간다는 뜻이다.

수원은 역사적으로 조선 후기에 가장 주목받는 도시였다. 정조 임금은 한양 다음 가는 신도시를 만들기로 하고, 대상지로 수원을 선택했다. 1793년 수원도호부를 유수부로 승급시키고, 1796년 이곳에 화성(華城)과 행궁(行宮)을 지었다. 그러나 건물을 완공한 지 4년 만에 정조는 갑자기 숨을 거뒀다. 더불어 수원을 최고의 신도시로 만들겠다는 정조의 꿈도 수장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번 수원특례시 지정 조치는 220여 년 동안 잠자고 있는 정조의 꿈을 다시 일깨울 수 있을까.


● 정조가 꿈꿨던 계획 신도시

수원화성 성곽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평가받고 있는 방화수류정. 수원=안영배 논설위원.

수원은 정조가 철저히 계산해 만든 계획도시다. 정조는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 묘를 양주 배봉산(현 서울시립대 뒷산)에서 수원 화산(현 경기 화성시 융릉)으로 이장했다. 수원에 아버지를 모신 정조는 곧장 수원 화성(華城)과 행궁을 축조했다. 실학자 정약용이 설계하고 재상 채제공이 총감독을 맡았다. 총력전을 펼친 결과 1794년에 착공한 지 불과 2년 9개월 만에 거대 성곽을 갖춘 계획도시가 탄생한다.

화성이 완공되자 정조는 백성들의 이주를 권했다. 수원으로 이주해온 거상(巨商)들에게는 인삼전매권을 부여하는 등 특혜도 줬다. 이에 따라 상인들이 모여들고 한양의 종로처럼 시전이 들어서는 등 도시는 번창해갔다. 수원시내 행궁 앞 도로가 ‘종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수원 상인들의 상술이 전국에 소문나고, 수원에서 알부자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정조의 덕분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의 주산인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 수원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수원=안영배 논설위원.

정조는 상업과 함께 농업도 발전시켰다. 농민들을 위해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를 만들어 주고, 둑을 막아 저수지를 조성하고, 농사지을 때 필요한 소까지 나눠주었다. 이후 수원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농업 기술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농촌진흥청(현재는 전주시로 이전), 서울대 농대 등이 이곳에 둥지를 튼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이처럼 수원화성은 자족 기능을 갖춘 조선 후기 최고의 계획도시였다. 생산과 상업 기능을 고루 갖춰야만 도시가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수원화성이 완성된 날인 10월 10일을 ‘도시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오늘날의 수도권 신도시와 유사한 기능도 갖고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수원은 한양과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에 자리한 거점도시였다. 따라서 수원화성이 성공한다면 서울(한양)의 기능을 남쪽으로 확장하고 범(凡) 한양권(수도권)을 구축하는 위성도시로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정조는 또 이런 성과를 전국적으로 확대 적용하려는 의지까지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정조의 풍수 안목

‘효’를 강조하기 위해 봉수당 내에 만든 정조 임금 밀랍 인형. 수원=안영배 논설위원.

정조는 수원 화성과 행궁 조성 과정에서 당시로서는 첨단 과학 기법을 적극 도입하면서 동시에 지형지세를 이용한 풍수지리설도 적극 활용했다. 정조 자신이 뛰어난 풍수지리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가 직접 쓴 ‘홍제전서’에는 웬만한 지관을 뺨칠 만한 수준의 풍수이론이 담겨 있다.

정조의 풍수 실력은 팔달산 아래에 지은 행궁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화성행궁은 건립 당시 21개 건물 576칸 규모의 정궁(正宮) 형태로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정조는 재위 중 12년간 13차례나 이곳에 내려와 머물렀고, 어머니 혜경공 홍씨의 회갑연도 이곳에서 가질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

정조의 풍수안(風水眼)으로 행궁을 살펴보자. 행궁은 서쪽의 팔달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아, 동쪽을 바라보는 형태다. 동쪽 맞은편으로는 직선거리로 600m 남짓한 지점에 봉돈(烽墩·동2포루와 동2치성 사이)이 들어선 언덕이 있다. 나지막한 언덕은 한 일(一) 자 모양으로 가로로 길게 누워 있는 모양새다. 지금은 행궁 앞으로 많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풍수에서는 이런 모양을 일자문성(一字文星)이라고 한다. 특히 앞산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매우 귀하게 여긴다. 정조 역시 ‘홍제전서’에서 일자문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행궁이 풍수적 이유로 서좌동향(西坐東向·서쪽에 자리 잡고 동쪽을 바라봄)으로 배치됐음을 알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화성전도. 화성과 해궁의 당시 모습이 묘사돼 있다.

행궁의 좌청룡과 우백호는 어떠할까. 정조는 수원화성의 동북쪽에 있는 용연(龍淵)에 직접 행차한 뒤 북쪽 용두암(龍頭巖)과 남쪽 귀암(龜巖)을 가리키며 “거북과 용이 상대하고 있으니 이는 정기의 신령함이 있다”고 칭찬했다. 행궁을 기준으로 보면 북쪽 용두암은 왼쪽을 보호해주는 좌청룡이 되고, 남쪽 귀암은 오른쪽을 보호해주는 우백호가 된다. 용과 거북이 서로 상대하면서 행궁을 지켜주니 길하다고 본 것이다.

용두암은 지금도 그 모습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수원 광교산 줄기가 용이 꿈틀거리듯 뻗어내려 자그마한 둔덕을 이룬 곳이 용두암이다. 바로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는 정자가 들어선 곳이다. 수원화성의 성곽 구조물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는 방화수류정에는 수원천이 휘돌아나가는 연못인 용연도 있다. 정조가 직접 지휘해 만든 용연은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뱃놀이를 즐길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크다. 이곳은 1919년 수원 3·1독립운동의 발원지로서, 역사적 의미도 갖고 있다.

용과 상대하는 구암은 어디일까. 1872년에 작성된 수원부지도를 보면 팔달문 근처에 야트막한 언덕인 구산(龜山·거북산)이 표시돼 있는데, 이것이 귀암(거북바위)으로 추정된다. 구산이 팔달산에서 보면 마치 거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용두암이 있는 방화수류정을 지나 흘러내리는 수원천이 구산 근처에서는 구천(龜川)으로 불린다는 점도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다만 지금은 도시 개발로 산이 깎여 그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화성행궁은 조선시대 지형지세를 중심으로 풍수를 반영해 지은 풍수적인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 팔달산 앞면의 행궁과 뒷면의 경지지사 관저의 풍수 길흉

봉수당 정문인 중양문. 수원=안영배 논설위원

수원의 주산이기도 한 팔달산은 동쪽에 행궁이 있고, 바로 산 정상 너머 서쪽에는 경기지사 관저가 있다. 관저는 9225㎡ 부지에 지상 2층 규모의 철근콘트리트로 지은 단독주택인데,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역대 경기지사들이 머무는 이 관사 터는 정조가 수원화성을 조성할 당시만 해도 나병환자를 격리하거나 시신을 안치했던 자리였다. 일제강점기 때도 전염병 환자를 격리 수용하던 곳이었다.

이곳은 풍수적으로 봐도 좋지 않은 터다. 산을 끼고 마을이나 건물이 들어설 때는 대체로 산의 얼굴인 앞면에 자리잡게 마련이다. 산의 등에 해당하는 뒷면은 지형이 가파르거나 땅 기운이 험해 보통 꺼린다. 정조가 수원화성을 축조할 때 팔달산의 동쪽으로 행궁을 앉힌 것도 이곳이 산의 앞면이기 때문이었다.

수원화성 지도. 그래픽=강동영 기자

반면 팔달산 뒷면 부위에 앉은 경기지사 관저는 역대 경기지사들이 대권 도전에 나섰다가 모두 실패하거나 구설에 휩싸였다. 그만큼 좋지 않은 터라 해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이인제 민선 초대 경기지사와 민선 3기 손학규 지사는 도지사 경력을 무기로 대권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2기 임창렬 지사는 부부가 구속되는 파란을 겪었다. 이를 의식한 민선 4기 남경필 지사는 관사를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하면서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 남 지사와 대결에서 승리한 이재명 5기 지사는 다시 이곳을 관사로 사용하고 있다. 만약 이재명 지사가 경기지사 역할을 잘 수행하고, 차기 대권에서도 승리한다면 ‘풍수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라는 새로운 공식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정조의 꿈을 담고 있는 수원의 발전 가능성은 무한히 크다. 한반도의 배꼽자리, 단전(丹田) 혈자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수원이 새롭게 부활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가 그만큼 밝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