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된 관 주도 인프라 의무화 규제 민간혁신 싹 잘라 20여 년 후퇴시켜
박용 경제부 차장
박 씨는 이렇게 해서 199.95달러짜리 스피커를 98.95달러에 손에 넣었다. 구매 금액이 200달러 미만이어서 관세도 없다. 소비세가 붙는 미 현지에 비해 서울에서 한국 카드로 20% 더 싸게 산 셈이다. 국내 판매가의 3분의 1도 안 됐다. 국경과 지리적 제약이 사라진 전자상거래 시대의 ‘마법’이다.
한국은 이런 시대에도 ‘재래시장 몇 km 내에선 대형마트를 열 수 없다’거나 ‘일요일엔 문을 닫아야 한다’는 철 지난 유통 규제와 씨름한다. 철기시대에 돌칼을 날카롭게 갈고 있는 석기시대 사람들을 만난 것처럼 답답하다. 한국 전자상거래의 ‘손톱 밑 가시’이던 공인인증서는 도입한 지 21년이 지난 10일에야 독점적 지위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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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국가 차원의 공인인증 덕분에 인터넷 뱅킹과 전자정부 서비스는 빠르게 확산됐지만 다른 나라들에선 통용되지 않는 한국만의 표준이었다. 국경을 넘어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는 인터넷 시대의 여권이 필요한데도 주민등록증만 들고 비행기를 타게 한 셈이다. 2014년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주인공이 입은 ‘천송이 코트’를 중국인들이 한국 인터넷 쇼핑몰에서 살 수 없다는 불만이 터져 나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둘째, 익스플로러 웹브라우저와 액티브엑스(X) 등을 내려받게 하는 기술 종속은 시장을 키우는 데 방해가 됐다. 구글의 크롬 웹브라우저나 애플 아이폰 등에선 한국 공인인증서가 돌아가지 않았다. 한국의 전자상거래는 세계 시장에서 더욱 고립된 ‘갈라파고스섬’으로 전락했다. 그런데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셋째, 정부는 2002년과 2003년 인터넷 뱅킹과 온라인 증권거래에 공인인증서 사용을 각각 의무화했다. 정부 독점은 시장에서 혁신의 싹을 없앴다. 민간 기업들이 새로운 인증 수단을 개발하거나 보안기술에 투자할 유인은 사라졌다. 정보기술(IT) 예산 중 정보보호 예산이 5% 이상인 한국 기업은 전체의 2.9%에 그친다.
넷째, 금융사고 책임은 소비자에게 전가됐다. 은행이나 인터넷 쇼핑몰들은 의무화된 공인인증서만 잘 챙기면 금융사고 책임을 지지 않았다. 소액결제에도 공인인증서를 요구하고 이용자에게 각종 보안 프로그램을 내려받게 해 인증서 관리 책임을 떠넘겼다. 미국에선 사고가 나면 1차 책임은 아마존이나 카드사가 진다. 신용카드사가 사기추적시스템(FDS)으로 감지해 부정거래를 선제적으로 막고 피해자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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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경제부 차장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