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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체제’ 구상, 현실적인가[동아 시론/안드레이 란코프]

입력 | 2020-09-30 03:00:00

대통령, 종전선언-평화 언급했지만 北은 남북자유접촉 허용하기 힘들어
南 적대시하며 군사태세 유지할 것, ‘냉전체제의 관리’가 현실적 목표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양대 교수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종전선언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가는 길에 대해 언급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평화체제’란 말만큼 많이 쓰인 관용구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대통령의 녹화 연설이 방송될 무렵 서해에서 남한 공무원이 북한 군인들에 의해 사살됐다. 이 만행으로 우리는 한반도의 현실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물론 ‘평화체제’ 자체는 좋은 구상이다. 기존에 목적으로 여겨온 ‘평화통일’보다는 현실성이 높은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평화체제’란 말은 도대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

이 관용구를 반복하는 사람들은 냉전체제로 고통 받는 한반도와 주변 지역이 평화체제 덕분에 나중에 오늘날의 유럽연합(EU)과 유사한 지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평화체제’는 남북 간 군사 대립이 사실상 사라지고, 북한이 ‘서울 불바다’라는 말로 남한을 협박하는 일이 있을 수 없으며, 최근 연평도 근해의 만행과 같은 일이 생길 수도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뿐만 아니라 이는 남한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아무 때나 묘향산을 등산하며 평양역을 경유해 모스크바까지 여행 가고, 북한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공장을 원산이나 신의주에서 개업할 수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꿈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북한 정권의 상황과 동북아 상황 때문이다. 실제로 가능한 것은 냉전체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뿐이다.

왜 그럴까. 먼저 북한은 남한인의 자유 방북과 남북 주민 간 자유 접촉을 허용할 수조차 없다. 북한 엘리트 계층은 사람들이 외부 생활, 특히 남한 생활을 알 수가 없어야만 국내 안전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북한은 국제전화든 인터넷이든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최근에 노동신문 국제면의 분량도 대폭 축소되었고, 보도되는 내용도 거의 모두 세계 각국의 지진, 홍수, 폭력 범죄, 전염병 확산 등에 관한 기사들이다. 사람들이 외국 생활, 특히 동족의 나라인 남한의 생활이 생지옥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해야 하며, 북한 국내가 외국과 비교할 때 사정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믿어야만 국내 안전 유지가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개방정책을 펼 수 있는 이유는 분단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분단국가인 북한의 경우, 남한은 북한 사람들에게 매우 매력적이다. 북한 당국자의 시각에서 남한에 대한 소식이 북한 내에 확산되는 것은 코로나 확산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위험한 것이다. 그 때문에 지금이나 수십 년 후에도 북한 당국자들은 ‘사상적인 코로나 확진자’나 다름없는 남한 방문객을 겨냥해 ‘사상적 방역’ 및 ‘사상적 거리 두기’ 조치를 엄격하게 실시해야 한다. 당연히 ‘평화체제’ 희망자들이 기대하는 자유로운 방문, 여행, 투자는 있을 수도 없다.

아울러 어떤 사람들의 희망과 달리 북한 엘리트 계층은 남북 간의 적대감이 사라지는 상황도 절대 환영할 수 없다. 북한의 체제 유지 조건 중 하나인 ‘사상 동원’을 장기적으로 유지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외부의 위협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외부 위협설은 북한 내부의 감시와 통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훌륭한 기술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북한은 남한을 ‘적’으로 묘사할 필요가 있다. 남북 관계가 좋아질 때 이 태도를 일시적으로 완화할 수 있지만, 얼마 후 다시 태도를 바꿀 것이다. 적이 없어진 북한은 장기적으로 생존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한이 매우 포용적인 대북정책을 취한다고 해도, 북한은 때때로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물론 ‘평화체제’를 추구하며 군사 긴장 완화를 추진한다면, 휴전선의 긴장감을 완화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군은 고도의 군사태세를 변함없이 유지할 것이며, 최근 발생한 공무원 사살과 같은 사건이 생길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한반도의 객관적인 정치 상황이다.

오늘날 한반도는 여전히 냉전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상황은 누군가의 잘못이나 흉계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여러 조건이 결합해서 나타난 불가피한 결과다.

문 대통령의 유엔 연설은 구체성이 결여된 듣기 좋은 말의 반복이었다. 물론 정부는 ‘평화체제’를 이야기하면서 현실적으로 긴장 완화를 추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 결코 기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2018년 봄 서울에서 고조되었던 장밋빛 일색의 전망들은 지금 보면 허망하기 짝이 없다. 2020년 한반도에서 현실적이라고 할 만한 장기 목표는 ‘냉전체제의 해체’가 아니라 ‘냉전체제의 안정적인 관리’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