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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자연인인가?[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입력 | 2020-09-21 03:00:00

〈21〉 영화 ‘멜랑콜리아’




행성 간 충돌로 인한 지구 멸망의 순간을 그린 영화 ‘멜랑콜리아’. 사진 출처 IMDb

기후 위기가 심각해지고 역병이 창궐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인류 문명의 위기를 이야기한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좀 더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말 이러다가는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멸종해 버릴지도 모른다. 다들 알다시피, 공룡은 한때 이 지구에서 최강의 포식자로 행세했으나 지금은 뼈다귀로나 존재한다. 인간은 한때 맹수에게 쫓기는 초라한 생물이었으나, 결국 자칭 만물의 영장이 되었고, 급기야 기후 위기를 자초한 생물이 되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없다. 인간이 아닌 자연의 관점에서는.

자연의 관점이란 무엇인가? 혹시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교양 프로그램에 답이 있을까? 도시 문명이 아닌 대자연 속에서 여유를 만끽하며 살아가는 이를 찾아간다는 취지의 ‘나는 자연인이다’는 특히 한국의 중장년 남성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에서 자연인으로 소개되는 이들의 특징은 보통 사람보다 자급자족도가 높고, 개구리찌개 같은 괴식을 즐기며, 문명의 이기를 덜 사용한다는 점이다. 자급자족이라고는 해도, 일찍이 벌어놓은 돈이 전원생활의 기초가 되며, 도시 생활을 끊었다는 이들이 TV 출연에 기꺼이 응하는 것을 보면, 과연 어떤 점에서 이들이 자연인인지 의아해지곤 한다. 과연 ‘자연인’이란 무엇인가? ‘자연 친화적’이란 무슨 말인가?

‘멜랑콜리아’에서 저스틴 역을 맡은 커스틴 던스트. 사진 출처 IMDb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멜랑콜리아’에 그 답이 있다. ‘멜랑콜리아’는 두 종류의 사람을 보여준다. 먼저, 인생이 즐거운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늘 쾌활하고 사교를 즐긴다. 한국에서라면 생일 파티를 기다리고, 단체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동문회에 자주 나갈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연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좋아하는 자연은 공들여 조성된 정원 같은 것이다. ‘멜랑콜리아’에 나오는 언니 클레어는 거대한 정원을 가진 저택에서 동생 저스틴을 위해 비싸고 성대한 결혼식을 베풀어 준다.

결혼식의 주인공 저스틴은 정반대 부류의 사람이다. 그녀는 우울하다. 그 어떤 것에도 진정으로 열광하지 않는다. 쾌활한 듯하다가도 느닷없이 침울해진다. 배우 장국영이 유서에다 그랬다던가, 감정이 피곤해 세상을 사랑할 마음이 없다고. 저스틴은 자신이 주인공인 결혼식마저 불편해한다. 인공적인 가식으로 가득한 결혼식장을 벗어나, 야외에 나가 생전 처음 보는 남자와 느닷없이 성교를 한다. 아니, 교미를 한다.

인생의 승리자는 클레어인 것 같다. 클레어 같은 사람은 사람들과 하하호호 해가며 사교 생활을 하고, 때가 되면 가족사진을 찍고, 가끔씩 저스틴에게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충고를 하며 늙어갈 것이다. 반면 매사에 우울한 저스틴은 점점 외로워질 것이다. 결국 저스틴은 고독사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갑자기 지구 멸망의 날이 온다면? 영화 ‘멜랑콜리아’는 지구 멸망의 날에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어떻게 달리 반응하는지를 관찰하는 사고 실험이다. 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와 충돌하려 하자, 클레어는 문명의 중심인 도시로 도망가려 애쓰고, 그녀의 부자 남편은 겁에 질려서 지레 자살한다. 새삼 더 우울할 것이 없는 저스틴은 오히려 담담하게 어린 조카를 달래며 지구의 종말을 맞는다. 행성 간 충돌로 인한 지구 멸망의 순간을 그린 ‘멜랑콜리아’의 마지막 장면은 몹시 아름다운데, 사실 어떤 파괴에도 아름다움은 깃들 수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종종 인간의 윤리와 충돌을 빚는다. 충돌하는 행성이 인간에게 무관심하듯이, 자연은 인간에게 무관심하다. 자연을 보호한다는 말은, 인간이 자기 필요에 최적화된 환경을 원한다는 말일 뿐이다. 자연은 그저 무관심하다.

누가 자연인인가? 그 어떤 자연 현상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우울한 저스틴이 자연인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