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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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주택 및 토지 임대료를 40% 낮추고, 계약해지 시에는 각각 3개월, 1년 전에 통보하라!‘택지·가옥 임차법’을 제정해 지주와 집주인의 횡포를 막아라!
노동자 및 공무원용으로 시영주택 150채를 신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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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주택난에 시달리던 부산 민중들이 1921년 8월 25일 부산시민대회에 참가해 구제책을 요구하는 모습. 대회장인 부산청년회관이 꽉 차 군중들이 장외까지 빽빽하게 모여 있다.
당시 부산에서는 인구가 늘어나며 부동산 가격이 상승할 조짐이 보이자 대부분의 시가지를 독과점하고 있던 일본인 대지주들이 땅을 그러쥐고 더 오르기를 기다렸습니다. 간혹 사겠다는 사람이 나오면 시가의 4, 5배를 불렀다고 합니다. 여기에 부산부(府)는 도시정비에 나서 도로를 낸다, 관공서를 짓는다, 혹은 풍치를 손상한다 해 낡은 조선인 주택들을 헐기 시작했습니다. 자연히 집이 부족해졌고, 집세가 폭등했습니다. 서민들은 도심에서 쫓겨나 초가를 짓고 살아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주택난을 이겨내지 못한 서민들은 도심 외곽에 토막을 짓고 비바람을 피해야 했다. 사진은 경성 송월동에 형성된 토막촌.
주택난은 비단 부산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수많은 농민들이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어 경성 대구 평양 등 대도시는 집이 크게 부족해졌습니다. 1920년 25만 명가량이었던 경성의 인구는 1925년 30만3000여 명, 1930년 35만5000여 명으로 증가했는데 이들이 살 집은 거의 신축되지 않아 만성적인 초과수요 상태가 됐고, 1~2원 하던 초가 한 칸 월세는 1922년에는 5원까지 거침없이 올랐습니다.
집 없는 설움은 일본인보다 조선 사람들이 훨씬 더 컸습니다. 1921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경성부가 그 해 4월 현재 시내 가옥을 조사한 결과 조선인은 4만7927가구인데 집은 1만6830채에 그칩니다. 무려 65%가 무주택 가구인 셈입니다. 반면 경성에 살던 일본인은 1만6414가구, 1만2378채로 무주택 가구 비율이 25%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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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이 모여 살던 토막촌은 일제의 도시정비로 번듯한 ‘문화주택’에 자리를 내주기 일쑤였다. 1931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는 ‘지척이 천리’라는 제목으로 문화주택과 오두막집이 공존하는 현상을 만화로 그려냈다. 일본 노랫가락이 흘러나오는 문화주택과 굶주린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오두막집의 정경이 대조적이다.
의도적 방화인지 실화(失火)인지 알 수 없지만 토막촌에는 유난히 불도 자주 났습니다. 1935년 2월엔 창신동 토막촌에 불이 나 일가족 8명이 숨지거나 화상을 입은 참사가 일어났는데 동아일보는 유족의 딱한 사정을 취재해 ‘토막은 차가운 잿더미가 되고 돈 없어 입원도 못해’라는 제목으로 보도해 온정을 호소했습니다. 다들 어려운 처지였지만 50전, 1원이라도 도우려는 손길이 이어졌고, 결국 유족들은 성금 200원(현재가치로 약 230만 원)으로 새 집을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원문
市區(시구) 改正(개정)에 伴(반)하야釜山府(부산부)의 住宅難(주택난)
현재에 부족한 집이 일쳔오백 호
시민대회를 열고 크게 운동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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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조선에 뎨일 큰 항구이요, 세계 각국의 일홈난 명사가 조선을 방문하는 첫 문간인 즉 부산은 실로 조선 사람을 세계에 소개하는 첫 인상의 중요한 곳이라.
이곳에 사는 조선 사람의 인구가 사만오천여 명이 잇스나 생존경쟁의 격렬한 물결에 부듸치인 조션 사람들은 차차로 시가의 번화한 거리로부터 쫓기여 영주동(瀛州洞‧영주동) 뒤산에 게딱지 가튼 초가집을 짓고 눈으로 참아 볼 수 업는 가련한 현상에 잇는 거슨 조선을 처음 찾는 여러 외국 사람에게 말할 수 업는 치욕이라.
부산의 유지 제씨는 이에 대하여 엇더케 하든지 구제책을 강구하고자 여러 번 상의한 일이 잇스나 원래 부산 시가는 이삼 명의 큰 디주가 부산 시가의 대부분을 차지하얏슴으로 그들은 이것을 긔화로 녁이여 수십 년 후에 집갑이 빗싸질 것을 생각하고 용이히 빌니지도 아니할 뿐 아니라 팔지도 아니하야
누구든지 집터를 빌녀달나는 사람이 잇스면 무리한 조건과 부당한 료금을 요구하고 집터를 팔나하면 현재 시가의 사오 배의 디가를 불너서 엇지 할 수 업는 형편이오, 심지어 학교 긔지 갓흔 것도 사오 배의 디가를 불너서 예뎡디를 변경한 일이 허다한대
이와 갓치 집터가 부족함을 딸아 집이 부족하고, 이에 따라서 집세가 폭등함으로 횡포한 집주인은 악독한 수단으로 세집사리 하는 사람의 피를 글거 폭리를 탐할 뿐 아니라 한편으로 부산부의 발뎐을 방해하고 한편으로 수만의 인민의 원성을 밧고 잇는대
근일 당국에셔 부산 시구 개정을 시작하매 집이 헐리게 된 자가 사십여 호인 중 이에 딸닌 수백 명 가족은 몃 집을 빼고는 전부 거처가 업게 되엿는대 시구 개정의 공사긔일은 점점 촉박함으로 퇴거명령이 성화갓다.
이와 가튼 비참한 경우에 빠진 그들은 여러 번 년긔하야 주기를 애걸하얏스나 임의 뎡하야노흔 일을 엇지 연긔할 수 잇스리요.
이에 유지 제씨는 이를 구제하고자 부산주택난구제긔성회(釜山住宅難救濟期成會‧부산 주택난 구제 기성회)를 발긔하야 지나간 삼일에 부산청년회 림시사무소에서 발긔총회를 열고 이 문뎨를 신중히 연구 토론코저 하고 일변으로 부산 전 시민의 여론을 일으키기 위하야
부산시민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고 안희제(安熙濟‧안희제) 김종범(金鍾範‧김종범) 씨 외 십사 인의 집행위원을 선정한 후 이에 대한 취지서를 배포하야 시민의 여론을 고취할 터인 바
현재 부족되는 주택의 수효는 로동자의 집이 팔백 호가 부족하고, 기타 사백여 호이요, 금후 시구 개뎡으로 헐닐 집이 사백여 호인 즉 일쳔오백여 호의 집이 부족한지라.
이 외에도 조선 사람 호수 구천여 호에 한 간에 한 호식 사는 사람이 태반이나 된다 한 즉 금후 이 문뎨의 여하는 부산 전 시민의 죽고 사는 큰 명맥이 달닌 대 사건이라 하겟더라. (부산)
현대문
시구 개정에 따라부산의 주택난
현재 부족한 집이 1500채
시민대회를 열고 대 운동 계획
부산은 조선의 제일 큰 항구요, 세계 각국의 이름난 명사가 조선을 방문할 때 첫 관문인 즉 부산은 실로 조선 사람을 세계에 소개하는 첫 인상을 남기는 중요한 곳이다.
이곳에 사는 조선인이 4만5000여 명이지만, 이들이 생존경쟁의 격렬한 물결에 부딪혀 시가의 번화한 거리에서 차차 쫓겨나 영주동 뒷산에 게딱지같은 초가집을 짓고 사는,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는 가련한 실상에 처한 것은 조선을 처음 찾는 여러 외국인에게 말할 수 없는 치욕이다.
이에 대해 부산의 여러 유지들은 어떻게 하든 구제책을 강구하려고 여러 번 상의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부산의 큰 지주 2, 3명이 부산 시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기화로 여겨 수십 년 뒤 집값이 오를 것으로 예상해 쉽게 땅을 빌려주지도, 팔지도 않아 누구든 집터를 빌려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무리한 조건과 부당한 금액을 요구하고, 집터를 팔라 하면 현재 시가의 4, 5배를 불러서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이요, 심지어 학교 기지 같은 것도 4, 5배의 지가를 요구해 예정지를 변경한 일이 허다하다.
이와 같이 집터가 부족함에 따라서 집이 부족하고, 또 이에 따라 집세가 폭등해 제멋대로 구는 집주인은 악독한 수단으로 셋집 사는 임차인의 피를 긁으며 폭리를 탐할 뿐 아니라 한편으로 부산의 발전을 방해하고, 또 한편으로 수만 인민의 원성을 받고 있다.
그런데 요사이 당국에서 부산 시구 개정을 시작하자 집이 헐리게 된 40여 채 가운데 이에 딸린 수백 명 가족은 몇 집을 빼고는 전부 거처를 잃게 됐는데 시구 개정의 공사기일이 점점 촉박해져 퇴거명령이 성화같다.
이 같은 비참한 상황에 처한 그들은 여러 번 공사를 연기해주기를 애걸했으나 이미 정해놓은 일을 어찌 연기할 수 있겠는가.
이에 부산 유지들은 이들을 구제하고자 부산 주택난 구제 기성회를 발기해 지난 3일 부산청년회 임시사무소에서 발기총회를 열고 이 문제를 신중히 연구 토론하고자 하고, 한편으로는 부산 전 시민의 여론을 일으키기 위해 부산시민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기성회는 안희제, 김종범 씨 외 14명의 집행위원을 선정한 뒤 이에 대한 취지서를 배포해 시민의 여론을 고취할 터이다.
현재 부족한 부산 주택의 수는 노동자의 집이 800채, 기타 400여 채요, 앞으로 시구 개정으로 헐릴 집이 400여 채인 즉 1500여 채의 집이 부족한 형편이다. 이밖에 조선 사람 9000여 가구 중 한 칸에 한 가구씩 사는 사람이 태반이라 하니 이 주택난을 어떻게 풀지 여하는 부산 전 시민이 죽고 사는 명운이 달린 큰 사건이라 하겠다. (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