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0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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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8월 24일 경성의 하늘은 맑았습니다. 가을에 접어드는 입추(立秋)와 더위가 그치는 처서(處暑)가 지나 한숨 돌리는 때였죠. 하지만 경성은 건드리면 터질 듯한 숨 막히는 긴장감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곳곳에서 칼과 육혈포로 무장한 일제 경찰이 눈을 번득였고 기마대와 차량대가 도로를 질주했습니다. 일제는 전날 밤 조선인이 묵는 여관은 물론 미심쩍은 집과 사람을 샅샅이 수색까지 했죠. 종로와 남대문 서대문 동대문 등의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거리에는 흰옷 입은 조선인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서성거리고 있었죠.
미국 의원단이 도착하는 8월 24일 독립 요구 시위에 동조해 문을 닫은 종로의 상점가
이날 오후 8시 미국 상하원 의원과 가족 등 40여 명의 시찰단을 태운 특별열차가 남대문역에 도착했습니다. 원래 7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시찰단은 필리핀 상하이 베이징 펑톈 등을 둘러본 뒤 곧장 도쿄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이들이 도중에 일정을 바꿔 1박2일 경성에 들르기로 하면서 비상이 걸렸습니다. 조선인들은 강력한 독립 의지와 열정을 보여주기 위해 제2의 3·1운동을 준비한 반면 일제는 이를 가로막으려 했던 것이죠.
의원단이 도착할 무렵 어둑한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거리의 조선인들은 수천 명으로 불어나 있었죠. 숙소인 조선호텔로 달리던 의원단 차량 몇 대가 대한문 앞으로 방향을 틀자 갑자기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경찰이 시위 주도자를 잡으려고 달려들자 군중들은 을지로와 종로 쪽으로 피하면서 계속 만세를 외쳤습니다. 청년 2명을 잡아가는 일제 형사를 군중이 육박전을 벌이며 막아 형사가 육혈포를 쏘는 일까지 벌어졌죠. 자정 가까이 되도록 곳곳에서 만세 함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동아일보는 8월 26일자 3면에 시위 상황을 자세하게 보도했습니다. 이때까지 의원단 움직임을 낱낱이 전한 것은 물론이었죠.
8월 24일 오후 8시경 남대문역에 도착해 특별열차에서 내린 한 미국 상하 의원단 일행
이에 앞서 의원단이 중국 일본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동아일보는 바빠졌습니다. 조선 독립을 호소하고 일제 탄압을 고발하며 세계에 우호적인 여론을 확산시키기 위해서였죠. 임시정부는 안창호를 위원장으로 한 교제위원단과 대표단을 구성해 여러 환영회와 면담 자리에서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이광수에게 ‘미국 의원단에게’라는 진정서를 ‘대한전국인민대표’와 ‘대한각여자계대표’ 명의로 각각 쓰게 해 전달하기도 했죠. 8월 초, 중순 평안남도 도청과 신의주 철도호텔 등의 폭탄 투척과 당일 시위도 임시정부 활동의 연장선이었습니다.
동아일보는 의원단이 경성을 방문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천리구(千里駒) 김동성과 추송(秋松) 장덕준 두 기자는 베이징에서 의원단과 접촉하며 취재도 했죠. 특히 김동성은 오하이오주립대학에서 공부하는 등 7년 간 미국에서 살아 영어가 능통했습니다. 김동성은 스티븐 포터 하원 외교위원장과 존 스몰 의원단장 등에게 경성 방문을 요청해 결국 성사시켰습니다. 일제가 경성에는 콜레라가 유행하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겁을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죠. 이 때 김동성이 포터 위원장과 다져놓은 친분은 1년 뒤 예상하지 못한 선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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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기자 leej@donga.com
원문
卄四日夜(입사일야) 米議員團(미의원단)을 迎(영)한 後(후)京城(경성)의 萬歲騷擾眞相(만세소요진상)
뎡거장에셔 비롯하야 남문안 태평통
구리개 대한문압 종로통 등 각처에셔
수쳔의 군즁은 『독립만셰』를 부르고
경관과 크게 격투하야 륙혈포를 노아
當夜(당야) 被捉者(피착자)는 近百名(근백명)
미국의원단 일행을 태운 특별렬차가 무사히 남문역에 도착하매 십여대의 자동차는 사십여인의 의원과 밋 그 가족을 태워가지고 경비가 엄중한 남대문통을 지나 조선호텔에 들어갈 새 동으로 몰니고 서으로 밀니는 수쳔 명의 구경군들은 부실부실 나리는 구즌비에 몸을 적시며 한사코 연도 부근을 떠나지 안으며 수근대는 양은 자못 무슨 변동이 금시에 날듯々々하더니 과연 의원단을 태운 몃 대의 자동차가 예뎡을 변하야 대한문 압을 지내일 즈음에 조선공론사(朝鮮公論社) 압헤서부터
대한문 압 너른 마당에서는 돌연히 『만세』!하는 소리가 이러나매 경위하든 경관 일동은 크게 놀내여 달녀드러 제지를 하며 한편으로는 눈에 띄우는 범인을 모조리 잡기를 시작할 즈음에 어느덧 군즁들은 떼를 지여 매일신문사 문압흘 지나 구리개 네거리로 사라젓는대 그동안에 본뎡서로 자바간 만세 부른 청년이 거의 삼십여인이나 되얏스며 구리개 네거리로 몰닌 군중은 잠시 묵々하야 경관에게 숨돌닐 시간을 좀 주더니 얼마 아니하야 다시 만세소래가 구리개 네거리를 중심을 삼고 크게 이러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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륙혈포를 노왓슴으로 군중은 잠시 헛치엇는대 이 사이에 종로서로 톄포된 쳥년의 수는 거의 사십여 명에 다다른 모양이요 종로 네거리에서 잠간 헤치엇든 군중은 또다시 함께 모히어 만세를 부르고 이번에는 동으로 우미관 압흘 향하야 가다가 마참내 다수한 경관대에게 해산을 당하고 마랏스나 처처에서 『만세』 『만세』 하는 소래는 거의 끈칠 사이가 업서 갓득이 긴장하얏든 일반시민의 신경은 더욱더욱 흉々하게 되엿스며 열한시가 지나가서는 거리거리 골목마다 즉히고 슨 경관들은
남녀로유를 물론하고 눈에 띄우는대로 붓드러 별별가지 신문을 다한 후 조금만 미심하면 그 자리에서 차고 따려가면서 돌녀보내엿슴으로 경성시민은 숑구함을 금치 못하고 맛치 전장에 잇는듯이 잠을 이루지도 못하얏더라.
二十五日(이십오일)에도
京城(경성)은 亦是(역시) 撤市(철시)
경관의 게엄은 어졔보다도
오히려 새롭게 엄즁하엿다
만세소래와 말굽소래에 인심이 흉々하든 경성시가는 극히 참담한 가운대에 이십사일 밤을 새이고 다시 미국의원단이 경성시가를 순람하는 이십오일을 마지하얏다. 이십사일 밤에 한잠도 못자고 경게를 하든 경관은 여전히 종로 네거리는 물론이어니와 기타 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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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피신을 못하야 순사에게 끌니여 나와서 할 일업시 상뎜문을 여러 노앗다가도 순사만 지나가면 여전히 빈지를 딱딱 드리고 피신을 하야 바리는 형편이라. 이에 경관들은 마주막 수단으로 허다못하야 상뎝 주인의 부인 가족들을 본서로 다려다가 문을 열나고 설유까지 하기에 이르럿는대 그중에도 모범매약상회 주인 리옥인(李玉仁)씨의 부인은 젓먹는 어린아해를 두고 종로서로 끌니여 드러가 몃 시간이 되도록 나오지를 안는다고 몃 사람 가족이 종로서 압헤서 수색이 만면하야 『아모 죄업는
어린아해까지 허긔가 지겟다』고 하는 양은 자못 잔인하야 보이엿스며 그뿐만 아니라 미국의원단이 순회할 도로 부근에는 삼사간만큼식 벌녀선 경관들은 금시에 무슨 큰일이나 날듯이 칼자루를 간득 잡고 조선사람이라고는 얼신도 못하게 하얏스며 의원 일행이 경복궁(景福宮)을 구경하러 갈 때에는 조심스럽다는 리유로 뎐차의 운뎐까지 일시 중지를 명하얏고 수십명식 떼를 지은 시위대의 자동차대와 밋 긔마대들은 경성시가를 수일사이 업시 순회를 하야 긋칠 줄을 모르고 십오일의 하로동안 경성시가는 오직 말굽소래와 칼집소래와 사자이 부르지즘 가튼 경비와 자동차의 경적소래와 밋 이 모든 소리에 몰녀다니는 수만 명 시민의 다름질 소래에 싸혓섯더라.
현대문
24일 밤 미 의원단을 맞은 뒤경성의 만세소요 진상
정거장에서 시작해 남문안 태평로
구리개 대한문 앞 종로통 등 곳곳에서
수천의 군중은 『독립만세』를 부르고
경관과 크게 맞서 싸우자 권총을 쏴
그날 밤 체포된 사람은 100명에 이르러
미국의원단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가 무사히 남대문역에 도착하자 10여 대의 자동차는 40여 명의 의원과 그 가족을 태운 뒤 경비가 삼엄한 남대문로를 지나 조선호텔에 들어갔다. 그 사이 동쪽으로 몰리고 서쪽으로 밀린 수천 명의 구경꾼들은 부슬부슬 내리는 궂은비에 몸을 적시며 한사코 길가 근처를 떠나지 않고 수군대는 모습은 자못 무슨 변동이 금세 날듯 말듯 했다. 과연 의원단을 태운 몇 대의 자동차가 예정을 바꿔 대한문 앞을 지날 즈음 조선공론사 앞에서부터 대한문 앞 넓은 마당에서는 돌연 『만세!』 하는 소리가 일어났다.
경계하던 경찰 일동은 크게 놀라 달려들어 제지하며 한편으로는 눈에 띄는 범인을 모조리 잡기 시작하자 어느덧 군중은 무리를 지어 매일신문사 문 앞을 지나 구리개 네거리로 사라졌다. 그동안 본정 경찰서로 잡아간 만세 부른 청년이 거의 30여 명이나 되었으며 구리개 네거리로 몰린 군중은 잠시 침묵해 경찰에게 숨돌릴 시간을 좀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만세소리가 구리개 네거리를 중심으로 삼아 크게 일어나 1000여 명의 군중은 북쪽으로 종로 네거리를 향해 달려가며 양쪽 인도에서 두 무리로 나뉘어 만세를 높이 부르고 종로 네거리까지 이르렀다.
그 사이 경찰들은 몽둥이와 칼자루로 만세 부른 듯한 사람은 닥치는 대로 붙잡아 길에다 쓰러뜨리고 함부로 구타해 한판의 단병접전이 일어난 듯한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마침 오후 9시 반쯤 제3부에 있는 어느 형사가 만세를 부른 청년 2명을 잡으려고 할 때 군중이 와~ 하고 덤벼서 그 청년을 빼앗으려 하면서 군중과 형사들은 크게 격투를 하던 중 형사가 마침내 권총을 쏘았음으로 군중은 잠시 흩어졌다.
이 사이에 종로서로 체포된 청년의 수는 거의 40여 명에 이른 모양이며 종로 네거리에서 잠깐 흩어졌던 군중은 또다시 함께 모여 만세를 부르고 이번에는 동쪽으로 우미관 앞을 향해 가다가 마침내 많은 경찰대에게 해산을 당하고 말았으나 곳곳에서 『만세』 『만세』하는 소리는 거의 끊일 새 없었다. 가뜩이나 긴장하였던 일반시민의 신경은 더욱더 흉흉하게 되었으며 11시가 지나서는 거리거리 골목마다 지키고 선 경찰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눈에 띄는 대로 붙잡아 신문을 했다. 조금만 미심쩍으면 그 자리에서 차고 때려가면서 돌려보냈으므로 경성시민은 두려움을 누르지 못하고 마치 전쟁터에 있는 듯이 잠을 자지도 못했다.
25일에도
경성은 역시 철시
경찰의 계엄은 어제보다도
오히려 새롭게 엄중하였다
만세소리와 말굽소리에 인심이 흉흉하든 경성시가는 극히 참담한 가운데 24일 밤을 밝히고 다시 미국의원단이 경성시가를 관람하는 25일을 맞았다. 24일 밤에 한잠도 못자고 경계를 하던 경찰은 여전히 종로 네거리는 물론이고 기타 여러 중요한 곳에는 기마순사와 각반 찬 순사가 24일 오후나 조금도 다름없이 경계를 하고 섰다.
상점 문은 여전히 첩첩이 닫혀 사뭇 온 시가는 자는 듯한 가운데 오직 경찰들의 칼집만이 햇볕에 되비쳐 맹렬한 살기를 온 시가에 퍼뜨릴 뿐이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흰옷 입은 군중은 여전히 규모가 적지 않아 경찰에게 한없는 걱정을 끼쳤으며 이날도 역시 식전부터 경찰은 첩첩이 닫힌 상점 문을 모조리 두드려가며 문을 열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인과 가족들은 이미 이 같은 위험을 예측하고 혹은 지방으로 달아나고 혹은 문밖으로 피신하였으므로 대개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혹 미리 피신하지 못하여 순사에게 끌려나와서 어쩔 수 없이 상점 문을 열어 놓았다가도 순사만 지나가면 여전히 널빤지를 딱딱 들이고 피신하여 버리는 형편이다. 이에 경찰은 마지막 수단으로 하다못해 상점 주인의 부인 가족들을 경찰서로 데려가 문을 열라고 타이르기에 이르렀다. 그중 모범매약상회 주인 이옥인 씨의 부인은 젖먹이 어린아이를 두고 종로서로 끌려가 몇 시간이 되도록 풀려나오지 않는다고 가족 몇 사람이 종로서 앞에서 슬픈 기색이 가득해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까지 허기가 지겠다』고 하는 모습은 자못 잔인해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의원단이 돌아다닐 도로 부근에는 서너 칸씩 벌려 선 경찰이 곧 무슨 큰일이나 일어날 듯이 칼자루를 잔뜩 잡고 조선사람이라고는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의원 일행이 경복궁을 구경하러 갈 때에는 조심스럽다는 이유로 전차 운행까지 일시 중지를 명하였고 수십 명씩 무리를 지은 차량 순찰대와 기마대들은 경성시가를 쉴 새 없이 순회하여 그칠 줄을 몰랐다. 25일 하루 동안 경성시가는 오직 말굽소리와 칼집소리와 사자의 부르짖음 같은 경비와 자동차의 경적소리 그리고 이 모든 소리에 몰려다니는 수만 명 시민의 달음박질 소리에 쌓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