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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걷다가… 돌담길 바라보며 맥주 한잔

입력 | 2020-01-20 03:00:00

[스트리트 인사이드]서울 종로구 ‘서순라길’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순라길에서 시민들이 우산을 쓰고 꽃집 앞을 걸어가고 있다. 서순라길은 조선시대 순라군이 야간에 순찰을 했던 길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돌담이 종묘의 담벼락이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17일 오후 서울지하철 3호선 종로3가역 8번 출구. 직진으로 100m가량 걸으면 종묘 돌담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카페와 와인바, 꽃집 등이 이어져 있다. 이 상점들을 왼쪽에 두고 오른쪽 종묘 담벼락 사이에 들어선 일방통행 도로가 ‘서순라길’이다.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익선동 한옥마을 골목에서 도보로 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 익선동과 달리 서순라길은 상대적으로 방문객이 적어 여유로운 모습이다. 직장인 이여진 씨(32·여)는 “지난해 여름 익선동 맛집을 찾다 우연히 이 길에 들어오게 됐다”며 “돌담길을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가 더 맛있게 느껴졌다. 산책할 때 운치가 있어서 가끔 온다”고 말했다.

서순라길에 붙은 ‘순라’는 조선시대 순찰제도로 도둑, 화재 등을 예방하기 위해 야간에 궁중과 도성 둘레를 순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담당하는 군인이 순라군이었고 이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던 길에 ‘순라길’이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붙여졌다. 종묘를 기준으로 서쪽 담장을 따라 난 길은 서(西)순라길, 동쪽 담장을 따라 이어진 길은 동(東)순라길이라고 한다. 맛집, 카페 등으로 유명해진 거리들이 대부분 비공식적으로 ‘○리단길’이라고 불리는 것과 달리 서순라길은 행정주소로 등록된 진짜 도로명이다. 서울시는 1995년 순라길을 역사문화탐방로로 지정했다.

현재 서순라길의 모습은 1995년 종로구가 차도로 정비하면서 갖춰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종묘 돌담 바로 옆까지 주택과 불법 점유시설이 들어서 통행 자체가 어려웠다. 1950년대 후반에는 이 일대에 좀도둑이 들끓어 정부가 아예 길을 막기도 했다. 게다가 서순라길에 카페나 술집 등이 오밀조밀 들어선 것은 불과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귀금속 상점, 소공인들의 점포, 창고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길에 2014년경부터 카페, 식당, 술집 등이 모이기 시작했다. 주택 밀집지역인 동순라길 일대에도 최근 카페, 식당 등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골목길 해설사인 안순화 씨는 “과거에도 서민들이 즐겨 찾는 잔술집이나 탁줏집이 더러 있기도 했다”고 말했다.

약 800m의 서순라길 중 종묘광장공원 인근인 남쪽 200m 구간에는 여전히 귀금속가게가 집중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나머지 600m 구간에 카페와 꽃집, 맥줏집, 와플가게, 레스토랑, 빈티지 옷가게, 주얼리 가게 등이 들어섰다. 가수 아이유의 영화 데뷔작인 ‘페르소나’에도 이 길이 등장한다. 아이유는 영화에서 서순라길에서 종묘광장공원으로 이어지는 약 1.1km 구간을 걷는다. 서순라길 중간쯤에는 한옥으로 지어진 서울주얼리지원센터 2관이 나온다. 2관에 마련된 주얼리 편집매장인 ‘스페이스42’에선 국내 신진 디자이너들이 만든 액세서리를 살펴볼 수 있다. 예카페 주인인 신성은 씨(51·여)는 “최근 방문객이 늘면서 하루 평균 80여 명이 가게를 찾는다”며 “도심에서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려는 사람들이나 한국의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들이 주로 온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지난해 9월부터 서순라길 보도와 가로수 정비를 시작했다. 겨울철로 들어서며 공사가 잠시 중단됐지만 올 3월 중순부터 정비 사업을 재개할 예정이다. 서순라길 남쪽에서 약 200m 지점에는 문화공연 등이 열리는 소통광장도 조성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순라길 인근에 위치한 돈화문로도 정비하고 있다. 앞으로 두 길을 찾는 시민들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