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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자연과 인간은 서로를 길들이며 진화했다

입력 | 2019-12-21 03:00:00

◇세상을 바꾼 길들임의 역사/앨리스 로버츠 지음·김명주 옮김/588쪽·2만5000원·푸른숲




꽤나 ‘이과’스러운 책이다.

문과 출신은 지레 겁먹으란 소린 아니다. 오히려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다만 단서 하나, 숫자 하나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는 내용에 살짝 겁이 날지도. 하지만 잘만 붙들면 그 끝에 호박고구마가 넝쿨째 달려 올라온다. 이렇게 신나는 과학책, 만나기 쉽지 않다.

영국 생물인류학자이자 해부학자인 저자는 인류사를 ‘길들임의 역사’라 명명한다. 대단할 것도 없다. 가축이나 곡식 얘기다. 야생 동식물을 길들여 이만큼 ‘등 따시고’ 배불렀던 거 누가 모르나. 한데 ‘걔들 입장’은 어떨까. 아낌없이 퍼주는 희생? 저자는 고개를 젓는다. 길들임은 상호작용이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들을 길들였듯, 우리 역시 그들에게 길들여졌다고.

인류의 가장 오랜 가축인 개를 살펴보자. 늑대에서 진화한 개는 당연히 여러모로 인간에게 이로운 동물이었다. 하지만 늑대 역시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약 3만 년 전 인류의 수렵채집 시절 늑대는 다가왔다. 추운 겨울 배를 곯던 그들에게 인간이 남긴 음식은 삶을 이어가는 원동력이 됐다. ‘친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책은 이 밖에도 밀과 옥수수, 사과, 닭과 소도 다뤘다. 특히 마지막 장 ‘인류’는 백미다. 인류가 인류를 스스로 어떻게 길들였는지 흥미롭게 설명한다.

앞서 얘기했지만, 이 책은 재밌다. 과학에 젬병이라도 무탈하게 다가갈 수 있다. 살짝 ‘덕후’긴 해도 차분하니 누구에게나 설명 잘하는 친구를 만난 듯하다. 솔직히 “인류 역사에 새바람을 일으킬 책”(영 일간지 가디언) 정도인진 모르겠지만, 답답했던 방 안을 환기시키는 시원한 공기를 선사하는 건 틀림없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