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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점 맞은 학생에게[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입력 | 2019-12-20 03:00:00


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학기말 시험 기간이다. 학생들은 시험으로 고통스러워하고, 가르치는 교수는 시험문제 출제와 채점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만점 맞은 학생도 있지만, 시험지에 글자 하나 쓰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쓰지 못할까 생각하면 잘못 가르쳤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롭다. 게다가 시험이 끝나면 상대평가를 하기 위해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줄을 세워야 한다. 90점과 89점, 1점 차이로 A학점과 B학점이 된다. 1점 차이가 어떤 의미에서 무슨 기준의 잣대가 될 수 있는지! 이런 해괴한 잣대를 가진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나는 평생 공부를 직업으로 삼았다. 나에게 공부는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다. 당연히 학교 밖을 나서면 서툴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의 물리학과 동료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 하나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다. 공부 쪽에서는 내로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일상과도 같은 공부를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강요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생각한다. 시험은 하나의 기술일 뿐이다. 학습에 대한 결과를 평가받는 것이지 자신의 삶을 평가받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인슈타인은 재수 끝에 취리히공대에 들어갔다. 어렵게 다시 들어간 대학에서 그는 물리학을 공부했다. 당시 이 대학에는 헤르만 민코프스키라는 당대 최고의 수학 교수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교수에게서 별로 영향을 받지도 않았고 배운 것도 없었다. 그 교수 역시 아인슈타인을 알아보지 못했다. 민코프스키 교수에게 아인슈타인은 수학에 관심이 없는 게으른 학생쯤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수학보다도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문제들과 실제 현상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여느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취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졸업 후 물리학 대리교사와 가정교사를 하다 1902년 친구의 도움으로 베른의 특허국에 어렵사리 취직했다.

1905년, 특허국에 근무하던 그는 특수상대성 이론을 세상에 발표했다. 민코프스키 교수는 이 혁명적인 논문을 읽고 상대성 이론을 4차원 시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재해석했다. 이는 상대성 이론을 수학적으로 시각화한 것이어서, 상대성 이론을 널리 알리는 촉진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만약 민코프스키의 시공간 개념이 없었다면 상대성 이론은 더 이상 발전이 없었을지 모른다. 상대성 이론의 결과는 넓고도 깊고,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빛의 속도가 보편상수가 되었으며, 이 기본적인 이론은 물리학 발전을 넘어 역사적인 진보를 가져왔다. 후일 민코프스키는 아인슈타인의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친구가 이런 훌륭한 일을 해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학생들의 학기말 시험 결과는 단지 공부의 기술을 평가받는 것이지, 자신의 철학과 삶의 목표, 꿈, 행복, 이런 것들을 평가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젊은 친구들에게, 공부라는 기술 자체를 이용해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며, 공부가 삶의 기술 중 하나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삶은 길고, 우리가 할 멋진 일은 더 많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