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강기 선택 버튼을 5곳 이상 누르면 불이 모두 꺼져 버리고 다시 누르면 1층으로 되돌아가 버린다’ ‘안쪽 문은 열렸는데 바깥쪽 문이 안 열린다’. 1979년 지어진 은마는 최근까지도 잦은 엘리베이터 고장이 큰 골칫거리였다. 폭염 폭우에는 정전도 잦았다. “녹물이 나와요” “바퀴벌레가 무더기로 다녀요”. 로고의 우아한 모습과는 달리 속앓이가 심했다. 최근에는 주변에 숲 하천도 없는데 모기 등 벌레가 많다는 주민들 민원이 많아 알고 보니 28개 동 지하실마다 생활쓰레기 등 폐기물이 2300t이나 쌓여 있었다.
▷1979년 4000가구 이상이 입주한 뒤 40년이 된 은마는 사용 연한도 차고 건물도 낡아 집주인들은 떠나고 실거주자의 65% 정도는 세입자다. 주변 학군이 좋다고 하고 대치동 학원가가 있어 ‘대전(대치동 전세)행’을 택하는 세입자 수요가 넘친다. 더욱이 2003년 재건축 추진위가 승인을 받은 이후 줄곧 대단지 재건축 후보지로 거론되며 ‘은마(銀馬)’가 아닌 ‘금마(金馬)’로도 불렸다. 강남을 대표한다는 명성이 있지만 이곳에 사는 학생들 가운데는 선뜻 사는 곳을 밝히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주위 신축 아파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하기 때문이다.
▷물이 고이는 저지대에 세워진 은마는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중소 건설 및 광산업을 하던 정태수 회장을 재계 14위 재벌 회장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디딤돌이 되었다. 풍수를 중시했던 정 씨는 지하음식점 냄새가 올라오고 주위가 소란해도 ‘명당’이라며 한보 본사를 은마종합상가 3층에 뒀다. 실제 거주 여건은 갈수록 악화되는데도 매매 가격으론 최고급 거주지 자리를 굳힌 은마는 집이 거주가 아니라 보유, 투자의 대상이 되어 버린 기형적 한국 부동산 시장의 상징물 같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