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할 때 현관문을 닫으니 온 집안의 조명이 꺼지고 난방은 외출 모드로 전환된다. 냉장고나 TV도 대기전력을 최소화하며 에너지 세이빙 모드로 바뀐다. 현관문을 나서면 미리 호출해둔 엘리베이터가 시간에 맞춰 도착한다. 퇴근할 때 현관문 출입 비밀번호를 일일이 누를 필요도 없다. 안면인식을 통해 자동으로 출입문이 열린다.
퇴근 뒤 집에서 쉬는 시간. 영화를 보려고 침대에 누워 인공지능(AI) 스피커에 ‘영화 보자’고 말을 건넨다. TV가 자동으로 켜지고 모션베드가 영화를 보기에 좋은 각도로 조절된다. 커튼이 자동으로 쳐지면서 조명도 영화 보기에 적절한 밝기로 조절된다.
지금도 일부 ‘스마트홈’에서는 가능한 생활이지만 2021년경부터는 이런 경험이 일상화될 것으로 보인다. 요즘 대형 건설사들의 화두 중 하나인 빅데이터를 활용한 AI 기술을 통해서다.
앞으로 지어지는 아파트는 이런 평가에서 점점 더 멀어질 것으로 보인다. 건설사들이 앞 다퉈 빅데이터를 활용해 똑똑하게, 남과 다른 경험을 원하는 밀레니얼 세대를 겨냥해 다양하게 변화하는 ‘변신 로봇’ 아파트를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 똑똑해지는 아파트
GS건설은 최근 국내 모든 통신사 음성 엔진과 연동이 가능한 ‘자이 AI 플랫폼’ 구축을 완료했다고 밝혔다. 스마트폰 앱, 음성인식 스피커 등과 플랫폼을 연계해 조명, 난방, 각종 가전 등 사물인터넷(IoT)을 이용하는 모든 실내 기기의 정보를 수집, 관리한다. 이를 통해 거주자의 생활 패턴을 파악해 자동으로 방마다 난방을 달리 해 온도를 최적화하는 식으로 세밀한 조정이 가능해진다.
건물 내 고장을 사전 예측해 알려주거나, 실내 인테리어 자재의 애프터서비스 기한을 알려줘 미리 제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도 선보인다. 실생활 뿐 아니라 주택 상태 전반을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는 것이다. GS건설 측은 “2021년까지 1만 세대에 이 같은 자이 플랫폼을 활용한 주거 관리 시스템을 도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내년 준공 예정인 ‘대구 복현자이’, 2021년 준공 예정인 서울 ‘방배그랑자이’ 등의 단지에 이 기술을 본격 적용할 예정이다.
앞으로 이 같은 서비스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될 전망이다. 피데스개발, 대우건설, 한국자산신탁, 해안건축이 공동으로 더리서치그룹을 통해 수도권 주택 소유자 및 배우자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9년 주거 공간 소비자 인식조사’에서 ‘스마트홈 서비스가 필요하냐’는 질문에 ‘필요하다’는 답변이 75.1%로 가장 많았다. ‘보통이다’(20.7%), ‘별로 필요하지 않다’(4.2%)는 답변이 뒤를 이었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주택은 가격대가 있는 상품이다 보니 구매 고객의 연령층이 높은 편이지만 이미 밀레니얼 세대도 아파트를 구입하는 나이에 돌입하고 있다”며 “개인적 취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디지털에 익숙한 밀레니얼 세대가 집에 대해 갖는 가치관을 반영해 주거 서비스부터 공간 구성까지 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변신하는 아파트
밀레니얼 세대가 미래 주택시장의 중요한 소비자로 부상하면서 주거의 ‘소프트웨어’ 뿐 아니라 ‘하드웨어’도 바뀌고 있다. 아파트라는 거주 형태 자체는 변화하지 않지만 실내 공간을 좀더 다양하게, 이전과는 다르게 구성하는 경향이 늘고 있는 것이다.
삼성물산은 서울 송파구 문정동에 있는 전시공간 래미안갤러리에서 주방 공간은 줄이고 다이닝 공간을 늘린 ‘컴팩트 키친’ 평면을 선보이고 있다. 간편식 시장이 점점 더 커지며 요리에 들이는 시간은 줄어들지만, 지인을 초대해 집에서 식탁을 멋지게 차리고 함께 식사를 하려는 수요는 늘어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거실 쪽에만 큰 창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다이닝 공간에서도 넓은 창을 통해 경치를 볼 수 있도록 했다.
대림산업이 지난해 자사 아파트 입주민 1200명을 대상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전용면적 70~74㎡ 입주민의 14.7%가 6인용 이상 식탁을 사용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비중은 전용면적 84㎡ 입주민 중에서는 33.3%, 전용면적 97㎡ 이상 입주민 중에서는 42.4%로 늘어났다. 식사 공간이 더 이상 주방에 딸린 부가 공간이 아니라 가족과 지인이 모여 소통하는 공간이 되면서 가구원 수나 평형과 관계없이 큰 식탁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트렌드를 반영해 대림산업은 식탁에서도 전기 콘센트를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식탁을 놓을 공간을 넓히는 등의 변화를 실제 설계에 도입하고 있다.
방의 개수와 크기를 바꿀 수 있도록 가변형 벽체를 도입하는 것도 여러 건설사 아파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변화다. 삼성물산은 래미안갤러리에서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는 가변형 벽체를 배치해 취미생활 등의 용도로 쓸 수 있는 ‘알파룸’을 선보이고 있다. 대림산업도 침실 간 벽을 터서 한 개의 커다란 방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설계를 도입하고 있다. 올해 9월 한국주택토지공사(LH)가 세종시에 준공한 장(長)수명 주택 실증단지에도 이 가변형 벽체가 도입됐다.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식구 수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변화에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어 장기간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가 될 수 있다.
현관 팬트리 공간을 넓혀 자전거, 퀵보드 등 취미 생활용 도구나 퍼스널 모빌리티 기기를 수납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밀레니얼 세대의 니즈를 반영한 설계다. 건조기 사용이 늘어나는 추세를 반영해 세탁실을 넓히고, 방마다 욕실을 두는 ‘원 룸 원 배스’ 구성은 가족끼리도 사생활을 존중하는 요즘 경향을 반영한다.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밀레니얼 세대는 과시적이면서 남과 차별되는 소비를 하는 세대”라며 “1인 가구가 대폭 늘어나는 인구학적 변화에 이들 세대의 등장이 겹쳐서 나타나면서 앞으로 아파트 공간의 구획은 더욱 다양화, 유연화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새샘 기자iams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