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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정보 과잉시대… 사람과의 접촉이 사치재[광화문에서/김유영]

입력 | 2019-11-08 03:00:00


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어느 놀이학교. 대기업 오너의 손주들이 많이 다닌다는 이곳은 뜻밖에도 첨단 건물이 아닌 2층짜리 낡은 주택에 있었다. 넓은 잔디 정원 한쪽에 모래밭과 그네가, 미니 사육장에 토끼와 강아지가 있었다. 독립서점처럼 꾸며진 작은 도서관에서 아이들이 언제든 그림책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디지털 접촉을 최소화한다는 원칙도 있었다. 30대 이상이라면 어릴 때 쉽게 누렸던 환경이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월 200만 원 안팎을 내야 다닐 수 있는 곳이 됐다.

이곳을 갑자기 떠올린 건 어린 시절 스크린을 많이 접할수록 뇌 발달 속도가 늦어진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를 접하고 나서다. 미국 신시내티 어린이병원 연구팀이 3~5세 아이들의 뇌를 자기공명영상(MRI)으로 분석했더니 스마트폰과 태블릿PC를 많이 볼수록 중추신경계에서 각종 정보를 전달하는 백질(white matter)의 질(質)이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생각과 감정 표현하기, 사물에 빠르게 이름 붙이기 등 인지 능력이 낮게 나왔다.

그래서인지 최첨단 디지털 기술의 본산인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테크기업 임직원들은 역설적으로 자녀에게만큼은 스크린을 허용하지 않는 ‘노 스크린(no screen)’ 교육을 고수한다. 자녀들은 자연과 놀이를 강조하는 발도르프 학교에 보내고 보모에게는 스마트폰 사용 금지 약속을 받아낸다. 심지어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는 자녀들에게 아이패드를 아예 안 줬고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은 식탁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금하고 취침 전 디지털 기기 사용 시간도 제한했다.

디지털 기기가 처음 등장했을 무렵 디지털을 접하는 사람이 그러지 못하는 사람보다 얻는 게 많아지는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디지털 격차)를 우려했지만 지금은 반대가 됐다. 오히려 소득·교육 수준이 높은 가구일수록 디지털 기기를 적게 쓰고 자녀에게 창의력과 깊이 있는 사고를 배양해 줘서 지적 자산을 대물림할 수 있다는 것. 디지털 과잉 시대에 걸맞은 ‘신(新) 디지털 디바이드’인 셈이다.

실제로 미국 보건정책 연구단체인 카이저가족재단의 조사 결과 부모 최종 학력이 고졸 이하인 경우 디지털 기기를 접하는 시간이 대졸 이상인 경우보다 하루 평균 90분 많았다. 한국에서도 저소득층 학생의 디지털 중독 위험이 더 크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사람과의 접촉이 사치재가 됐다(Human Contact Is Now a Luxury Good)’는 올 초 뉴욕타임스 기사가 생각난다. 빈자(貧者)의 삶에 스크린이 더 많이 들어오고 부자의 삶에선 스크린이 사라진다. 패스트푸드처럼 강하고 빠른 자극이 아닌 오감을 풍부하게 하는 느린 자극을 받아 인지·정서 등의 발달 수준이 높은 아이가 사회적으로 더 성취할 확률이 크다. 이들은 무인 자판기에 줄 서서 주문해 허겁지겁 밥 먹기보다는 인간 웨이터가 서빙하는 식당에서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고, 사무실에선 스마트폰을 안달복달 확인 안 해도 되는 삶을 살 개연성이 높다.

일부러 디지털 기기를 많이 보여주려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자녀를 보살필 마음의 여유, 체력의 여유, 시간의 여유가 없으면 디지털 기기를 내어주곤 한다. 전문가들은 사람이나 실생활(real world)로부터의 자극을 늘려야 발달 수준을 높일 수 있다며 아이 생각을 들어주고 아이에게 말을 걸며 사소한 눈 맞춤을 늘리라고 한다. 그러려면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21세기 희소자원인 시간이야말로 모든 부모에게 충분히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우리 아이 뒤처지지 않게 하려면 쥐어짜내는 수밖에. 출산율이 바닥 치는 마당에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라도 확보해 주는 게 그나마 현실적인 복지일지 모르겠다.

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