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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조기유학 붐 몰고온 남다른 열정 스토리

입력 | 2019-11-02 03:00:00

[그때 그 베스트셀러]
◇7막 7장 그리고 그 후/홍정욱 지음/302쪽·8800원·위즈덤하우스




신동해 웅진씽크빅 단행본사업본부 편집주간

‘세상의 유일한 죄악은 평범해지는 것’이란 명언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소년이 있었다. 영화배우 아버지에게 외모를 물려받고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 속에서 영글어간 이 소년 속에는 유난스러운 불길이 있었다. ‘위대한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 어느 날 소년은 케네디 위인전을 보게 되고,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소년은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수많은 위기를 넘겼고 마침내 하버드대에 입성한다.

1993년, 사람들은 이 소년 영웅 서사에 열광했다. ‘7막 7장’이 출간된 뒤 조기 유학 붐이 일었고, 저자가 다녔던 초트 고등학교에는 평소의 10배가 넘는 한국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책은 순식간에 100만 권을 돌파했고, 독후감 대상이 됐다.

사람들은 이 유난스러운 소년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찾았던 것일까? 강한 불씨를 얻어다가 답답한 우리 아들 가슴에도 불을 댕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책을 읽어 보면 이 소년은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무시무시할 정도의 불길을 태운다. 어지간한 부모는 뒷감당조차 할 수 없다. 나중에 하버드대보다 어려운 스탠퍼드대 로스쿨에 진학한 것이나 실리콘밸리 창업, 33세에 언론사 인수, 국회의원과 사업가로 변신, 도서 보급 사업 전개…. 도무지 평범한 구석이 없는 인생이다.

어쩌면 우리가 진짜로 원했던 것은 위험한 열정 그 자체가 아니라, 한때의 노력을 과잉 대표해 주고 평생 보증해 주는 졸업장이라는 상징이었을 것이다. 내 모든 말과 행동에 오라(aura)를 뿌려주고, 만나지 못했을 사람과 사귈 수 있게 해주며, 상대를 필요 이상으로 긴장시키는 마법의 망토. 중·고등학교 몇 년을 희생한 대가로 평생을 다른 계급에서 살게 해주는 ‘가성비 갑의 치트키’.

‘7막 7장’은 당시로서는 난공불락의 끝판왕을 깬 한 소년 플레이어의 루트를 따라 가고자 했던 수많은 게이머들을 동시에 뛰게 만들었다. 이 길고 긴 군비 경쟁의 역사는 ‘스카이캐슬’의 비극으로 진행 중이다(홍정욱 본인이 책을 한때 절판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의미한 키 재기를 하다가 모두가 하이힐만 신고 말았다. 발이 너무 아프지만 누구도 먼저 내려올 용기는 없다.

하버드대는 노벨상과 함께 한국 독서 시장에서 유난한 상징이다. 삶에 충실한 젊음이 거쳐 가는 성장의 계기가 아니라, 조로(早老)한 학생과 부모들이 빠른 인생 정복을 위해 갖고 싶어 하는 종결템이다. 지난달에도 ‘하버드 부모들은 어떻게 키웠을까’ ‘나의 하버드 수학 시간’이란 책들이 연달아 나왔는데, 모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충실한 내용의 책들이고 독자 평도 좋아 뿌듯하면서도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앞으로도 우리는 다른 영웅들의 가슴속 불씨를 얻으러 다녀야 할까. 차곡차곡 장작을 쟁일 틈을 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면서, 피가 나는 발을 질질 끌면서.
 
신동해 웅진씽크빅 단행본사업본부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