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발해 유민사 조명 926년 멸망한 발해 주민들 수백년간 거란-요나라에 저항 금나라서는 고위관직 지내기도
편찬 책임자인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뒤 세운 동단국(東丹國)을 조명했다. 동단국은 설립 직후부터 발해인의 계속된 저항을 받았다. 이에 우차상(右次相·고위 관직의 하나) 야율우지가 “남은 무리(발해 유민)가 조금씩 번식하면 아마도 후환이 될 것(遺種浸以蕃息 恐爲後患)”이라고 건의했고, 동단국은 928년 요양(랴오양·遼陽) 지역으로 옮겨졌다. 임 연구위원은 “이를 거부한 발해 주민들이 고려와 여진으로 달아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발해가 멸망한 지 200년 가까이 지나서도 발해인들은 반요(反遼) 투쟁을 벌였다. 요나라 때 발해인의 성격을 검토한 나영남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1115년 금의 건국에 자극받은 고욕이 요나라에 반란을 일으켰고, 이듬해에는 고영창이 대발해 황제를 칭하고 한때 요동의 50여 개 주를 함락시키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황인규 동국대 교수는 승려와 신도, 사원과 유적으로 나누어 발해 유민이 문화적 정체성을 지켰던 ‘발해 불교’의 흔적을 조명했다.
임상선 연구위원에 따르면 중국 학계가 발해를 자신의 역사로 간주한 건 오늘날 ‘국민’의 개념에 가까운 ‘중화민족’을 주장하면서부터다. 임 연구위원은 “발해 유민은 발해 멸망 이후 약 200년간 어디에 살건 거란인, 송(宋)인, 고려인이 아니라 발해인으로 자칭했고 그렇게 분류됐다”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