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기/한유주 지음/228쪽·1만3000원/문학과지성사
점점 늪에 빠져드는 착각이 든다.
한 작가의 소설집 ‘연대기’는 문장마다 부비트랩이 설치돼 있다. 딱히 폭발하진 않는다. 피 흘리는 외상은 없다. 근데 피해가기 힘들다. 겨우 몇 줄 읽다가 허우적거린다. 또 몇 페이지 넘기다 고꾸라진다. 어떤 단편은 도대체 뭘 읽은 건지 몽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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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나의 행복을 염탐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의 불행을 염탐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도 나를 염탐하지 않았다.”(단편 ‘일곱 명의 동명이인들과 각자의 순간들’에서)
그래서인가. 시로 펄떡거리던 소설은 문득문득 에세이로도 폐부를 찌른다. 상처와 적의를 함께 드러내고, 봉합과 방치를 구분하지 않는다. 딱히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속박을 불편해한다. 그저 퍼덕거리다가 웅크리다가. 이런 비릿한 생경함을 만나는 건 언제나 반갑고 고맙다.
다만 한 작가로 특정할 수 없는 아쉬움도 입가에 맴돈다. 이 정서, 그리 낯설지 않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연장선이랄까. 그들은 부정하겠지만, 출구 없는 지식인의 침잠은 이제 좀 식상하다. 기껏 내러티브를 지웠다지만 그 역시 벌써 정형화한 종착역이 아닐는지. 언제까지 우리는 ‘하수구’만 들여다봐야 할까. 이제 좀 청명한 바람에 땀도 식히고 싶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