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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뚝에 달린 가족 생계… 가정과 꿈 다 지킨 사나이

입력 | 2019-08-16 03:00:00

[열정은 프로 내 옆의 고수]
완력 안 강해 지구력으로 극복…국내 정복 후 美대회서도 4위 선전
임신 아내 반년 설득해 전업 선언
잘나가다 인대-힘줄 치명적 부상…손상 부위 덜 쓰며 힘 내는 법 익혀




국내 팔씨름 통합랭킹 1위 백성열 씨(오른쪽)가 8일 대한씨름연맹이 ‘제2회 팔씨름 데이’를 맞아 진행한 배틀에이트(Battle 8) 대회에서 경기를 치르고 있다. 신경 손상으로 악력이 줄어든 그는 그립이 풀리지 않게 하기 위해 상대 선수와 손을 엮는 ‘스트랩’을 최대한 활용한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지난해 7월 백성열 씨(36)는 팔씨름 대회가 끝나고 오른손의 감각이 둔해지는 것을 느꼈다. 손끝이 저렸고 쿡쿡 찔러도 평소보다 감각이 덜 느껴졌다.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해 병원을 찾았다. 손목과 팔꿈치의 신경 손상이 발견됐다. 손끝까지 전달돼야 할 전기 신호가 평소의 60%밖에 전달되지 않았다. 오른손 악력이 왼손보다도 약해졌다.

팔씨름 선수로는 치명적인 소식을 들은 순간 백 씨는 아내 얼굴을 떠올렸다. 2015년 말 체육관을 열며 국내 처음으로 ‘팔씨름 전업 선수’를 선언한 그였다. 첫째를 임신하고 있는 아내를 반년 넘게 설득해 내린 결단이었다. 결사반대하던 아내는 ‘계획이나 들어 보자’며 자리에 앉았다. 백 씨는 약속을 하나 했다.

“4년. 딱 4년만 해볼게. 그때까지 자리 확실히 잡고 당신 편하게 해줄게.”

백 씨와 팔씨름의 인연은 19세 때 시작됐다. 당시 다니던 피트니스 클럽에서 팔씨름 동호회 회원들이 주최한 대회가 열렸다. 팔씨름만큼은 자신 있었던 백 씨는 호기롭게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8명 중 4위에 그쳤다.

“충격이 컸죠. 중학생 때부터 삼촌들이랑 팔씨름을 해 지지 않았거든요. 팔씨름이 힘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쓰라린 패배의 경험이 가슴에 불을 댕겼다. 당장 동호회에 가입한 뒤 전국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팔씨름을 배웠다. 당시만 해도 ‘엉터리 교사’가 많았다.

“무턱대고 손바닥을 돌 벽에 찧으라는 사람도 있었고, 딱 5분 가르쳐주고 스승이라고 생색내는 사람도 있었죠. 그래도 재밌었어요. 무림의 강호들을 찾아다니는 기분이었으니까요.”

팔씨름을 생업으로 삼기 전에는 다양한 일을 했다. 대학 졸업 후 발전소에서 일하기도 하고, 개인사업을 하다 실패도 맛봤다. 그러면서도 팔씨름 경력은 차곡차곡 쌓아갔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완력은 강하지 않았지만 지구력과 경기를 운영하는 능력으로 힘 차이를 극복했다. 2014년 말 국내에서 가장 큰 대회인 ‘실비스 클래식’에서 우승을 차지한 그는 2015년 미국에서 열린 ‘아널드 클래식 암레슬링 챌린지’ 90kg급에서 4위를 차지하며 국제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90kg급, 100kg급, 100kg 이상급 등 3체급을 석권하며 통합랭킹 1위를 차지했다.

물이 새는 지하에서 시작한 체육관은 수강생이 늘면서 지상의 쾌적한 공간으로 옮겼다. 유튜브 채널 구독자가 늘면서 고정적인 수입도 생겼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아내의 얼굴에 웃음이 번질 즈음 찾아온 부상은 뼈아팠다. 근육의 피로는 쉬면 나아졌지만 인대와 힘줄, 관절, 신경은 좀체 회복되지 않았다. 팔씨름 선수로서 해야 할 훈련과 생업을 위한 팔씨름 교습, 유튜브 활동은 모두 그의 팔을 조금씩 갉아 먹었다. 그렇지만 ‘팔씨름 전업 선수’가 팔씨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2015년 아내의 배 속에 있던 아들은 어느새 네 살이 됐고 두 살짜리 여동생도 생겼다.

신경 손상 진단을 받은 지 1년여가 흘렀다. 여전히 오른손의 감각은 온전하지 않지만 그는 손상 부위를 덜 쓰면서 힘을 내는 방법을 익히고 있다. 그립이 풀리지 않게 하는 스트랩도 최대한 활용한다. 이달 8일 대한팔씨름연맹이 ‘팔씨름 데이’를 맞아 개최한 대회에서 그는 5승 2패로 3위를 했다. 부상 부위를 덜 사용하기 위해 새 기술을 쓰다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해 아쉽게 우승을 놓쳤다.

“아내와 약속한 4년이 거의 다 됐어요. 자리는 어느 정도 잡았고요. 제 팔이 언제까지 버틸지는 잘 모르겠지만 힘닿는 데까지 할 겁니다. 이제야 꿈과 가정을 모두 챙길 수 있게 됐으니까요.”

조응형 기자 yesbr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