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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지치고, 사라지고…북-중 신밀월과 하노이 후유증 [하태원 기자의 우아한]

입력 | 2019-06-21 14:00:00


2월 말에 열렸던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후유증이 커지고 있습니다. 2018년 ‘천지개벽’을 연상케 할 정도로 평화무드가 완연했던 한반도 정세가 다시 한 번 요동칠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그 변화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 듯합니다. 2020년 중반에 다시 한 번 한반도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주장까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1) 아프고, 지치고, 사라지고…

하노이 기차여행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평양에서 하노이 왕복이동거리만 9000km. 베트남으로 갈 때 66시간, 평양으로 돌아올 때 61시간 등 무려 127시간의 기차여행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팠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하노이 정상회담을 위해 66시간 동안 전용열차를 타고 이동했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핵 담판’에 대해 잔뜩 기대를 걸고 떠났던 하노이 행 전용열차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전 세계로 생중계 된 정상회담장을 빈손으로 떠난 뒤 올라탄 평양행 기차 안의 분위기가 어땠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을 수행했던 북한 엘리트들이 대부분 70대 이상의 고령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할 포인트입니다.

일부 언론에서 실각설, 숙청설이 제기됐던 인사들의 상당수는 ‘병치레’까지 했다는 것이 대북 소식통들의 전언입니다.

최근 통일전선부장 직함을 떼고(노동당 부위원장 직함은 유지) 핼쑥해진 모습으로 나타난 김영철이 대표적인 경우죠. 김영철과 접촉을 유지했던 한 인사는 “원래부터 지병이 심했다. 허리를 굽히지 못해 구두끈을 묶지 못할 정도였다”고 증언했습니다. 하노이 결렬 직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숙청이라기보다는 ‘와병’ 쪽에 무게가 실린다는 주장입니다.

이희호 여사 장례에 조문 메시지를 전달했던 김여정 역시 상당기간 ‘여독(旅毒)’에 시달렸던 것으로 전해집이다. 공식 석상에서 사라진 김혁철 전 대미특별대표나 김성혜 통전부 통일책략실장은 협상실패의 책임에 따른 문책을 받았다는 관측이 유력합니다. 모두 다 하노이 후유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실각설, 숙청설이 제기된 북측 인사들. 김영철 김여정 김혁철 김성혜. (왼쪽부터)



2)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

어쩌면 우리 정부에 가장 뼈아픈 대목일 수도 있겠습니다. 2018년의 ‘성공’을 견인했던 추동력의 원천은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이 우리에게 가졌던 굳건한(?) 신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창 동계올림픽 참석 이후 김 위원장의 뜻을 적극적으로 전달해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을 이끌어 낸 것은 우리 정부의 외교력 덕분 이었습니다. 개최 직전 무산될 뻔 했던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불씨를 살려낸 것이 문재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판문점 깜짝 회동(2018년 5월)이었고, 트럼프 대통령을 협상장으로 불러 낸 것 역시 우리 정부의 북한 핵폐기 의지에 대한 ‘보증’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노이 2차 정상회담 결렬 과정을 거치며 우리의 ‘중재력’은 한계를 보였고 북한 정권 핵심부는 상당히 실망감을 표시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2018년 9월 평양정상회담을 마친 뒤 평양공동선언에 서명한 남북 정상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2018년 9월 평양 정상회담 공동선언 5조에 명시된 △동창리 미사일 시설 영구 폐기 △영변핵시설 영구폐기를 토대로 미국의 대북제재 해제 또는 완화를 끌어내 달라는 것이 북한의 요청이었죠. 하지만 거듭된 노력에도 트럼프 행정부를 설득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문재인 정부에 레버리지(지렛대)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겁니다.

지속적으로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에 북한이 보이는 싸늘한 반응은 이 같은 기류의 반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3) 북-중 신밀월

하노이 후유증의 결과는 북-중 신 밀월(蜜月)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과의 협상 동력을 잃었고, 의도적으로 한국을 봉남(封南)하고 있지만 14년 만의 첫 중국 국가주석 방북이라는 매력적인 과실을 차지했습니다. 일단은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친 채 2년 사이 4번이나 중국을 찾아 시진핑 주석을 만난 정도로 공을 들인 결과로 보입니다.

특히 하노이 정상회담 직전 이뤄진 올해 4차 방중은 자신의 생일날(1월 8일) 전격적으로 이뤄졌고, 싱가포르 정상회담 때에는 시 주석이 내준 중국 국적기를 타고 공항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북-중 신 밀월의 배경에는 격화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 간의 무역전쟁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쨌거나 북한으로서는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 없는 북-중-러 3각 동맹의 복원을 거의 완성해 가고 있는 단계입니다. 반면 이른바 남방3각 동맹인 한-미-일의 구도는 그리 탄탄해 보이지 않습니다.


● 너무도 초라해 보이는 ‘지렛대’

이 시점에 나온 정부의 대북 식량지원 카드는 좀 애처로워 보입니다. 북한이 우리 정부의 직접 지원을 꺼려하니 세계식량계획(WFP)이라는 우회로를 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받을 사람은 별로 고마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추가적 식량지원의 여지를 남겨뒀는데 이 조치가 남북대화를 재개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면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금강산 관광재개나 개성공단 재가동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공연히 불안감을 조장한다고 비판하실지 모르시겠지만 내년 중반기에 다시 한 번 한반도가 위기에 빠져들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들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상황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일을 어쩝니까. 미국 트럼프 행정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우리의 대북 접근법 훈수(訓手)가 먹히지 않는 것 같고, 평양의 주요 정책결정자들에게는 우리가 가진 지렛대가 이쑤시개 보다 작아 보이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시진핑 주석의 북한 방문이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우리 정부의 기대는 그래서 ‘나이브’해 보입니다.

하태원 채널A 보도제작팀장(부장급·정치학 박사수료)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