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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정원수]로펌 영입 광고 다음 날 청와대행, 상식 밖 인사

입력 | 2019-05-23 03:00:00


정원수 사회부 차장

16일 전국 법원청사에 배달된 법률 전문지에 로펌의 변호사 영입 광고가 실렸다. 양복 차림에 붉은색 넥타이를 맨 변호사의 명함판 얼굴 사진과 이름 아래 인천지법 부장판사를 지냈다는 경력이 적혀 있었다. 하루 뒤인 17일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 광고의 김영식 변호사(52·사법연수원 30기)를 민정수석실 법무비서관으로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한 판사는 “얼마 전 김 비서관이 로펌에 간다는 메일을 받았다.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새 출발을 하나 싶었는데, 청와대 인사 발표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또 다른 판사는 “어리둥절하고, 아연실색”이라고 했다. 올 2월 법복을 벗은 김 비서관이 불과 3개월 만에 판사에서 변호사로 ‘경력 세탁’을 한 뒤 청와대에 입성한 게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김 비서관은 1987년 민주화운동을 하다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 86학번 이한열 씨의 동기다. 학생운동을 하다 늦깎이로 1998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법관이 된 김 비서관은 종종 소신 판결을 했다. 2016년 10월 광주지법 근무 당시 항소심 재판장으로서는 처음으로 양심적 병역 거부를 무죄로 판결했다. 상급법원 판단에 도전한 것이다. 대법원이 ‘병역의 의무가 양심의 자유보다 우선한다’는 기존 판례를 바꾼 것은 지난해다.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무죄 선고 당시 그는 “인권 선진국에 진입한 만큼 인권 문제를 고민해야 될 것 같다”고 했다.

사석에선 그를 형으로 부르고 따르는 후배 법관이 많았다. 법원 내에선 ‘행동대장’으로도 불린다. 그는 대통령 탄핵과 조기 정권 교체에 이어 사법 권력이 물갈이되기 시작한 2017년 이후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적극 참여했다. 법관회의에서 그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법원이 자체 조사할 게 아니라 검찰이 수사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법관회의가 의혹 연루 판사에 대한 법관 탄핵을 요구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역사의 큰 흐름이 바뀌려면 희생양이 필요하다’고 한 그의 발언이 잊히지 않는다”고 하는 판사들이 많다.

청와대에서 법무비서관실은 ‘내부 로펌’ 역할을 한다. 직제상 국정 현안 및 정책에 대한 법령 해석이나 법률 판단을 내리는 것이 주 업무다. 청와대와 사법부의 가교 역할도 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 등 후보군이 여러 명 있는데도 청와대는 지난달 중순부터 김 비서관을 굳이 단수 후보로 정해놓고, 인사 검증을 했다고 한다.

김 비서관이 진보 성향 법관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와 그 후신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이었다는 점 때문에 같은 모임의 판사들조차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두 연구모임 출신이라서 대법원과 헌재의 요직에 중용된다는 비판이 많은데, 앞으로 청와대가 이를 무시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김 비서관의 전임도 국제인권법연구회 핵심 회원이었다.

무엇보다 재판만 생각하며 살아온 평범한 판사들이 이번 인사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사법부가 청와대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판사가 법복을 벗고 사법부 관련 업무를 맡는 청와대 참모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그가 법관으로서 했던 말의 진정성이, 그의 말을 믿고 다수 의견에 섰던 판사들의 정의감이 송두리째 의심받고 있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