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배 선생의 시-수필-논문 등 1920∼60년대 발표 글 묶어 출간
국어문법 체계를 확립한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 작은 사진은 최근 발간한 ‘외솔 최현배의 문학·논술·논문전집’(1∼4권). 동아일보DB·외솔회 제공
“아랫목은 식당되고, 웃목은 뒷간이라./물통을 책상하여, 책으로 벗삼으니,/봄바람 가을비 소리 창 밖으로 지나다.”(‘나날의 살이’에서)
국어학자이자 애국지사인 외솔 최현배 선생(1894∼1970)이 일제강점기 옥중에서 쓴 시조다. 그는 1941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붙잡혀 광복 때까지 4년간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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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부터 한두 해 동안, 나는 시골서 처음으로 중학교 교원 노릇을 하였다. …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서 끊임없이 진행되는 경제의 착취, 문화의 말살, 생기(生氣)의 타격들을 몸소 당하면서 겨레의 장래를 생각하매, 암담하기만 함을 느낄 뿐이었다.”
외솔이 1958년 ‘연세춘추’에 실은 글이다. 그는 일본 유학에서 페스탈로치의 교육사상을 공부하고 조선에 돌아온 뒤 1926년 장편 논문 ‘조선 민족 갱생의 도’를 60여 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발표했다. 외솔은 “예상 이상으로 전국의 식자들의 공명을 얻었으며, 청년 독서자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이는 당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선생이 누차 나에게 그런 소식을 말함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1956년 한글날을 맞이한 신문 기고에서는 일제강점기 한글운동의 의미를 돌이켰다. “삼천만 동포가 한 사람의 글소경도 없이 되도록 하자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동아일보가 중심이 되어 크게 세상을 깨우친 일이 있다”고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