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현 논설위원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 창조금융이란 이름으로 기술평가신용(TCB) 대출제도가 도입됐다. 기술력이 우수하지만 담보력이 미약한 창업 초기 기업에 대해 무담보 무보증 대출을 확대하자는 것이다. 초기에 금융당국은 은행들 줄 세우기를 하고 실적이 좋지 않으면 각종 불이익을 주곤 했다. 그러자 ‘정부에 정책이 있으면 민간에는 대책이 있다’는 말처럼 본점에서는 일선 지점으로 TCB 대출을 늘리라는 지침을 내렸고 일선 창구에서는 기존 신용대출을 포함해 바꿀 수 있는 것은 모두 TCB 항목으로 바꾸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적어도 장부상으로는 갑자기 선진 대출 시스템으로 진화한 것이다.
TCB와 비슷한 시기에 ‘관계형 대출’도 도입됐다. 신용등급이 낮아도 사장의 도덕성, 경영 의지, 성장성 등을 평가해 중소기업 등에 대출해 주라는 제도다. 은행들은 속으로는 전형적인 탁상행정, 관치금융이라고 비웃었지만 여러 편법을 통해 실적도 맞추고 금융당국의 비위도 맞췄다.
은행들은 여기에도 ‘취지 공감, 실행 곤란’이라며 속으로 답답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사물인터넷(IoT)이 잘 발달됐다고 해도 해당 기업의 재고를 어떻게 일일이 파악할 수 있으며, 해당 기업이 부도가 나면 담보로 잡은 특허권 상표권은 어디에서 처분하느냐는 것이다. 아직 우리나라에 특허를 사고파는 시장은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미미하다. 은행이 담보로 얻은 특허권으로 사업을 할 것도 아니고 건전성 악화로 이어질 소지가 크다.
한발 더 나아간 게 영세 자영업자 맞춤형 대출이다. 신용은 양호하지만 매출이 적고 담보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가 주요 대상이라고 한다. 역시 취지는 훌륭하다. 은행들의 사회공헌자금도 적극 활용하라고 한다. 정책금융을 넘어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을 땜질하는 정치금융 성격이 다분하다.
예나 지금이나 은행은 금융당국의 영원한 ‘을’이다. 자칫 은행 경영진은 주주들로부터 배임행위로 항의 혹은 소송을 당할 것이냐, 감독당국으로부터 실적 부진으로 문책을 당할 것이냐를 놓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상황이 올 것이다.
다른 제도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금융은 사전 관련 제도의 정비가 중요하다. 너무 앞서면 부작용이 드러나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편법이 횡행하기 마련이다. 일괄담보 대출, 자영업자 맞춤형 대출이 좋은 취지대로 현장에서 정착하려면 금융당국은 은행들을 억누르지 말고,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