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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둥이 아빠’ 정재훈 서울여대 교수의 생생 육아 일기

입력 | 2019-03-10 10:16:00

아이를 낳았다. 행복해졌다!
정재훈 서울여대 교수는 1963년생이다. 1992년 큰딸, 2015년 작은 아들을 각각 얻었다. 첫째와 스무 살 넘게 터울이 지는 둘째를 키우며 비로소 ‘아빠 됨’의 기쁨을 알았다는 그를 만났다.




[지호영 기자]

1월 17일 새해 벽두부터 ‘이러다 나라 망하겠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이 사상 최초로 0명대를 기록했다는 발표가 나오면서다. 1970년만 해도 가구당 아이 수가 다섯 명 안팎인 게 보통이었다(합계출산율 4.53). 이제는 여성 한 명이 평생 낳는 자녀 수가 한 명 미만으로 줄었다. 이런 세태에 비춰 보면 정 교수는 다소 특이한 사람이다. 아이가 하나 있는 상황에서, 쉰이 넘은 나이에 둘째를 또 가졌으니 말이다. 1992년 태어난 정 교수 큰딸이 20대에 접어든 2015년, 그의 작은 아들이 첫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막 뜀박질하며 세상을 배워가는 둘째는 정 교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삶의 중심은 육아”

정재훈 교수(오른쪽)가 배우자와 함께 아들 뺨에 입을 맞추고 있다.


- 동년배 분들과 생활 패턴이 많이 다르겠네요.

“물론이죠(웃음). 아이가 태어난 후 저녁 6시 이후 집에 들어간 날이 손에 꼽혀요. 2017년까지는 1년에 대여섯 번이었습니다.”

- 작년부터 좀 달라졌나요?

“저녁 약속을 1년에 열 번쯤 잡을 수 있게 됐죠(웃음). 장인어른·장모님과 함께 살아서 낮에는 두 분이 아이를 돌봐주세요. 출근 전, 퇴근 후에는 우리 부부가 육아를 책임지는 게 원칙이고요. 직장인들이 들으면 위화감을 느낄지 모르겠는데, 일찍 퇴근한다고 일을 안 하는 건 아닙니다(웃음).”

- 퇴근 후 시간을 어떻게 보내시나요.

“배우자와 함께 아이 먹이고, 씻기고, 같이 놀기도 해요. 오후 9시쯤 모두 잠자리에 들고요. 일어나는 시간은 다음 날 오전 3시 무렵입니다. 매일은 아니지만, 거의 늘 그 시간에 하루를 시작해요. 우리 부부 둘 다 그렇습니다.

둘째 출산 당시 배우자가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이었어요.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느라 새벽부터 책 읽고 논문을 썼죠. 아침에 저와 같이 출근해 각자 연구실로 갔고요. 박사 학위를 받은 지금도 그때와 다름없이 생활합니다. 아침에 같이 나오고, 같은 시간에 귀가하고, 새벽부터 일하고…. 육아도 당연히 둘이 같이 해요.”

- 매일 저녁 6시 전 집에 들어가는 직장인은 우리나라에 거의 없을 겁니다. 그렇게 ‘칼퇴근’ 해도 괜찮은가요?

“다행히 아직 잘리거나 월급이 깎이지는 않았어요(웃음). 교수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있어서인지 제 앞에서 드러내놓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요(웃음).”

정 교수는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꽤 많은 사회적 네트워크에 속해 있었다. 지금은 그런 데서 모두 떨어져 나온 듯한 느낌을 받긴 한다”며 웃었다.

“둘째가 태어난 지 이제 곧 만 4년이 됩니다. 그동안 거의 매일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는 건, 달리 말하면 제가 정말 많은 제안을 꾸준히 거절해왔다는 뜻이 되거든요. 그래서인지 요새는 사회적으로 만나는 어느 누구도 저를 자기편으로 생각지 않는 것 같아요. 그걸 아니까 예전보다 좀 더 긴장하며 살게 되고요. 내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 내가 쓰는 글이 ‘그저 그렇다’는 평가를 받으면 세상 어디에도 발붙일 수 없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해요.”

- 그런데도 매일 오후 6시까지 집에 들어가는 이유가 있나요?

“아이를 돌봐야 하니까요(웃음). 어린 자녀에게는 양육자가 필요해요. 그게 아버지로서 제 할 일이니, 거절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최대한 거절하는 게 당연한 거죠.”

“큰딸아, 미안하다”

정 교수가 처음부터 이 상황을 ‘당연하게’ 여긴 건 아니다. 1992년 큰딸이 태어났을 때 그는 독일 유학생이었다. 박사과정 재학 중이던 ‘아빠’와 석사과정을 밟던 ‘엄마’는 둘 다 갓난아이가 부모에게 요구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미처 모르는 상태였다고 한다. 나이가 찼으니 ‘남들 하는 대로’ 아이를 낳았을 뿐이다.

정 교수는 “딸이 태어나고 한동안은 아이 엄마와 배턴 터치하듯 교대로 학교 집을 오갔다. 공부, 육아 어느 쪽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시간이 서너 달쯤 이어지자 ‘이러다가는 학위를 못 받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커졌다”고 했다.

-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서울에 계시는 부모님께 연락 드렸습니다. 아이를 데려가 키워달라고요.”

정 교수는 1999년 박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귀국했다. 그때까지 큰딸의 주 양육자는 정 교수 부모였다고 한다. 아이는 독일 대학 방학 기간에 맞춰 1년에 3개월쯤 독일에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가곤 했다.

- 우리나라 저출산 현상 원인으로 ‘일·가정 양립이 어려운 점’을 꼽는 사람이 많은데, 당시 교수님 상황이 꼭 그랬군요.

“돌아보면 아이 키우며 공부하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그때는 마음이 조급해 그런 생각을 못 했어요.”

정 교수는 그 선택이 부부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첫 결혼의 배우자와 헤어졌다. 2000년 귀국 후 딸 양육은 사실상 정 교수가 도맡았다고 한다.

- 아빠 혼자 딸을 키우는 게 쉽지 않으셨겠습니다.


“한동안은 제가 제법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딸한테 ‘내가 너 키우느라 정말 고생했다’고 큰소리치며 살 수 있을 줄 알았죠(웃음). 둘째를 낳고서야 그게 아닌 걸 알았습니다. 재혼한 뒤 장모님 댁에서 같이 살게 돼 지금은 딸과 따로 지내요. 아이를 볼 때마다 ‘옛날에 미안했어’라고 말합니다.”

- 뭐가 그렇게 미안하신데요.

“시간적·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것, 조급했던 것, 바깥일과 집안일을 분리해 생각한 것…. 너무 많죠. 큰애가 어릴 때 같이 독일 장난감 가게에 간 일이 있어요. 얘가 애들 타는 자동차 앞에서 한동안 꼼짝을 않고 서 있더라고요. 갖고 싶어서 그러는 걸 알겠는데, 당시엔 형편이 안 됐죠. 얼마 뒤 동료 유학생 집에 갔더니 거짓말처럼 그 자동차가 있었어요. 우리 애는 한번 타보고 싶어 하고, 그 집 애는 못 타게 하던 장면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아이가 장난감 가게에서 눈짓만 한 번 해도 냉큼 사줄 수 있게 됐거든요(웃음).

돈뿐 아니라 마음의 여유도 달라진 것 같아요. 지금은 아이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충분히 지켜볼 수 있게 됐어요. 사회적 네트워크가 다 끊어져도 ‘아이 키우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고 흔들리지 않죠.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첫째 때는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반성합니다. 왜 그렇게 학위 받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아이를 기다려주지 못하고 내가 앞서 이끌려고만 했을까….”

‘아빠 됨’의 행복

[지호영 기자]


정 교수는 “그때는 일하고 아이 키우는 게 모두 나를 완성하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걸 몰랐다. 일과 육아를 분리한 채 둘 다 잘하려고 했을 뿐, 그것과 내 삶을 연결짓지는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둘째가 태어난 뒤 느낀 건, 자녀 양육이 한 사람을 오롯이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점이에요. 내 뜻대로 이끌려 하지 않고 아이를 충분히 살피며 소통하다 보면 아이가 자라듯 저도 성장하게 된다는 걸 알았어요. 사람을 이해하는 건 사회생활할 때도 꼭 필요한 일이잖아요. 둘째를 키우며 다른 사람을 대하는 자세도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아요.”

- 좀 더 좋은 사람이 된 건가요?

“최소한 말이 줄어든 건 확실합니다(웃음). 현저하게 말수가 줄었고, 사람들 앞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일도 줄었죠. 여전히 저를 내세울 때가 있긴 하겠지만,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느껴요.”

정 교수는 이후 삶이 훨씬 편안해졌다며 영화 ‘과속스캔들’ 얘기를 꺼냈다. 남자가 아빠가 됐을 때 나타나는 변화를 잘 보여준다는 이유에서다. 이 영화 주인공은 30대 중반 잘나가는 연예인 남현수(차태현 분)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앞에 ‘내가 당신 딸’이라고 주장하는 황정남(박보영 분)이 나타나면서 소동이 벌어진다. 스무 살 갓 넘은 황정남에게는 여섯 살배기 아들까지 딸려 있다.

“영화 초반 카메라가 남현수 집을 보여주는데 그렇게 깔끔하고 정갈할 수가 없어요. 아이가 들어온 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고 말지만요. 아이는 그런 존재죠. 보통 남자들은 그걸 모르고요. 독일에서 큰딸을 낳았을 때 저도 그랬어요. 황정남처럼 어느 날 불쑥 찾아온 것도 아니고 10개월 기다려 얻은 딸인데도, 그 아이가 태어나면 더는 전처럼 살 수 없게 될 거라는 걸 아예 몰랐습니다.”

- 그래서 딸을 한국에 보내셨고요.

“나름대로 상황을 수습했던 건데…(웃음). 남현수도 처음엔 황정남을 자기 삶에 받아들이지 못하죠. 그러다 점점 아이와의 관계에 적응해가고요. 그 과정에서 겪는 시행착오를 보면서 많이 공감했습니다.

‘이 아이가 내 딸이구나’라고 인식한 뒤 뭐든 막 해주려고 하거든요. 정작 아이는 싫어하는 것들을요. 두 사람 관계는 아빠가 딸의 욕구를 받아들이고 아이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비로소 달라지기 시작해요. 제가 ‘과속스캔들’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본 장면은 남현수가 황정남에게 전화해 ‘최소한 노래는 하러 와라’ 라고 말하던 부분입니다. 아이를 이해하는 아빠로서의 삶이 시작되던 대목이죠. 상당수 우리나라 남자가 하지 못하는 걸 남현수는 해내요.

‘과속스캔들’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건 그렇게 ‘아빠 됨’을 선택한 뒤 남현수의 삶이 매우 풍요로워진다는 점입니다. CF 제안이 쏟아지고, 일도 마음먹은 대로 술술 풀리고(웃음). 저는 그 영화 메시지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아빠가 되면 삶이 행복해진다.’ 그건 제가 요즘 매일 느끼는 점이기도 하고요.”

정 교수는 그렇다고 청년들에게 출산과 육아를 권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삶의 계획표에 따라 스스로 신중하게 생각하고 선택할 문제라고 생각해서다. ‘저출산=사회문제’라는 시각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사회복지전문가인 그는 “아이가 적게 태어난다고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니다”라며 “진짜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건 구성원들이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현실 그 자체”라고 지적했다.

‘살기 좋은 사회’를 위한 새로운 상상

손을 맞잡은 정재훈 교수 가족 사진.


“자기 생각에 별로인 직장, 학교에 누가 들어오려고 하면 ‘그러지 마’ 하고 말리잖아요. 저는 우리 사회 현재 출산율이 바로 그 현상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생각해요. 사회 구성원 사이에 암묵적으로 ‘여기는 살 만한 곳이 아니야’라며 새로운 사람 진입을 막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겁니다.

저는 꽤 오랫동안 아이가 더 많이 태어나게 하려면 좀 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정부가 지난해 12월 7일 발표한 ‘저출산·고령사회 정책 로드맵’에 비로소 성평등 구현에 대한 내용이 들어갔어요.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이 자기 삶에 만족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아이를 낳아볼까’ 생각하는 사람도 자연스레 늘어날 거예요.”

정 교수는 그러면서 영화 ‘맘마미아’ 얘기를 꺼냈다. 2008년 국내 개봉해 극장에서만 관객을 400만 명 이상 동원한 작품이다. 1970년대 큰 인기를 끈 팝그룹 ‘아바’ 노래를 기초로 만든 영화라 그 시절 청년기를 보낸 중장년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 주인공 도나(메릴 스트립 분)는 아빠가 누구인지 모르는 딸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 분)를 낳아 혼자 길렀다. 장성한 소피가 엄마 일기장을 뒤져 ‘아빠 후보’ 세 명을 찾아낸 뒤 이들을 모두 자기 결혼식에 초대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 우리나라에서라면 젊은 여성이 자기 결혼식에 ‘아빠 후보’ 세 명을 초대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겠죠?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소피는 사람들이 뒤에서 ‘근본 없는 아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컸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맘마미아’에는 그 외에도 우리나라 기성세대가 불편하게 받아들일 만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어요. 도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결혼을 세 번 했죠. 소피는 결혼식이 열리기 직전 이를 취소하고 남자친구와 긴 여행을 떠나고요. 영화 ‘맘마미아’를 재밌게 본 사람들이, 현실에서도 이런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면 저는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훨씬 살기 좋은 곳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자녀한테 동거를 먼저 권하지는 못해도 ‘결혼 안 하고 그냥 한번 살아보면 안 돼?’라고 물을 때 말리거나 방해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비혼가족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다양한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모두 존중하면 출산율은 자연히 올라갈 겁니다.”

정 교수가 바라는 건 바로 그런, 다양성이 인정되고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딸 아들이 자라는 것이다. 그는 “아이를 키우면 미래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 언젠가는 내가 없는 세상에서 아이가 살아가게 될 것 아닌가. 그 세상이 지금보다 나은 곳이면 좋겠다. 사회복지학자로서 오랫동안 국가적이고 정책적인 문제를 푸는 데 집중했는데, 아빠를 주요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뒤에는 작고 현실적인 부분에도 눈길이 간다”고 했다.

“정부가 미세먼지를 없애고자 인공강우를 뿌려도, 바로 내 아이 앞에서 누군가 엔진공회전을 하고 있으면 소용없는 일이 되잖아요. 아이 미래가 걱정되면 자녀를 둔 부모부터 엔진공회전을 멈춰야죠. 내 아이뿐 아니라 모든 아이, 모든 사람이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야죠. 이제는 삶의 많은 순간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웃음).”

어쩌면 아이 때문에 사는 게 다소 피곤해진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아빠가 됨으로써 얻은 기쁨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는 “셋째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크게 웃더니 “둘째 초등학교 졸업할 때 나는 퇴직할 나이가 된다. 이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며 아이와 내가 함께 성장하는 경험을 계속하고 싶다”고 밝혔다.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 3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