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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위대한 역사 100주년 속의 불협화음

입력 | 2019-02-27 03:00:00

3·1운동과 상하이임시정부 수립… 민주공화국의 근원인 위대한 역사
실제로는 편협한 선양을 하고, 뒤로 폄훼하는 역사 끌어들이면서
말로만 높이 평가해선 안 돼




송평인 논설위원

문재인 정부는 3·1운동과 그 결실로 건립된 임시정부 100주년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그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북한 정권은 물론이고 남한에서도 1980년대 ‘해방전후사의 인식’ 출간 이후 3·1운동과 임시정부를 폄훼하는 강력한 흐름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물론 문 대통령이 북한에 100주년 공동 기념을 제안한 것이나 중국 공산당 정부에 임시정부 지원에 대한 감사를 표한 것은 방향이 틀린 것이다. 법률가가 아니면 역사가가 됐을 것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드는 착각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 무리한 제안이나 엉뚱한 감사에서 3·1운동과 임시정부를 강조하려는 의지는 더 뚜렷했다고 볼 수도 있다.

3·1운동의 위대함은 비폭력 저항에 있다. 일제의 총칼 앞에 맨손으로 자유와 독립을 외치다 쓰러진 선조들은 너무 숭고해서 그들이 종교적 순교자처럼 느껴진다. 숭고는 두렵고 떨리는 감정을 느낄 때 쓰는 표현이다. 헌법에 따라 평화롭게 시위할 권리를 보장받은 위에서 맘껏 시위할 권리를 행사한 촛불집회를 그런 권리 자체를 얻기 위해 순교적으로 싸운 3·1운동에 견주는 것은 적절한 역사적 비유가 아니다.

신채호는 3·1운동 후 그 운동이 폭력적 중심을 형성하지 못해 실패했다고 비판하고 김원봉의 의열단 투쟁을 지지했다. 그러나 의열단 투쟁은 영화적 감수성에 더 맞을지 몰라도 새롭지도 전략적이지도 않은 데다 나중에 대부분 공산주의 투쟁으로 흡수되고 만다.

3·1운동의 비폭력 저항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10년간의 무장투쟁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다. 나라가 망하자 만주와 연해주로 활동무대를 옮긴 독립운동가들은 이국땅에서 풍찬노숙하며 의열단 이전에 의열단보다 더 체계적으로 싸웠다. 무장투쟁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겨룰 만한 상대라면 무장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1919년 당시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필사적인 투쟁도 세계적 강국의 반열에 오른 일본을 무너뜨리기에는 너무 무력했다. 문제는 나라가 있고 힘도 커져 싸울 만하고 싸워야 할 때는 평화를 강조하고, 싸우는 것 자체가 무모할 때는 싸움을 강조하는 뒤틀린 역사가들이다.

비폭력 저항은 일견 가장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관계가 제국주의적 약육강식(弱肉强食)에서 벗어나 인도주의에 입각한 민족자결주의와 국제공동안보의 새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현실성을 얻기 시작했다. 3·1운동 직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는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근대사 초유의 두 운동이 갖는 시대적 동시성과 그 국제적 조건에 주목하지 않으면 3·1운동의 노선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거니와 이후의 외교전과 애국계몽운동의 의의도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

“3·1운동의 피로 임정이 세워졌다.” 김구의 선전부장이었던 엄항섭의 말이다. 3·1운동과 임정의 관계는 이렇게 단순히 말할 수밖에 없다. 임정에 대한 국민의 위임은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루소식의 일반의지가 형성되듯 임정이 세워졌을 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마음으로 승인했다. 그렇게 우리는 헌법에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라고 새기게 됐다.

신채호는 한국사를 묘청이 김부식에 패하고, 최영이 이성계에 패하고, 정인홍이 인조 세력에 패한 실패의 역사로만 본다. 그것은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로 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대한민국사를 매도하다가 돌연 임정 운운하다 보니 말이 꼬이고 해방정국에서 임정을 봉대한 세력의 대부분을 무시하고 김구만을 선양하는 옹졸한 결과가 빚어지고 있다.

해방정국에서 임정을 쌈 싸듯 말아 먹으려 한 두 세력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박헌영의 남로당이라고 지적한 것은 바로 김구의 비서로 일했던 장준하다. 남로당이 주도한 대구폭동을 대구인민항쟁으로 미화한 학자가 청와대에 들어가고 친정부적 공영방송들은 도올 김용옥을 통해 여순반란을 여순민중항쟁으로 미화하는 말을 공공연히 퍼뜨리고 있다. 말로는 임정을 높이면서 실제로는 임정을 폄훼하며 결국 북한에 합세한 남로당과 여운형과 김원봉을 미화하는 기괴한 불협화음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