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백년 만의 귀환: 3·1운동의 기록 국사편찬위-본보 27일 3·1운동 100주년 학술회의
3·1운동 당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진관사 태극기(등록문화재 제458호)
#1. 1919년 3월 2일 밤. 황해도 곡산에서 천도교를 이끌던 김희룡은 경성에서 전달된 독립선언서를 전달받는다. 천도교 지휘부 10여 명은 3월 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시위를 계획한다. 그러나 독립선언서만으로 대열을 이끌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결국 이들이 고안해 낸 방법은 ‘깃발’이었다. 4일이 되자 ‘조선독립’이라고 적힌 큼지막한 깃발을 만들어 군중 수백 명과 함께 황해도 지역의 3·1만세시위를 이끈다.
1919년 3월 1일부터 전국을 만세의 함성으로 울리게 한 3·1운동의 중심에는 태극기, 독립기와 같은 깃발과 애국가, 독립가 등 노래가 있었다. 3·1운동에 참여한 대중에게 ‘독립’이라는 메시지를 각인시켜 준 ‘미디어’인 셈이다.
최근 구축된 국사편찬위원회(국편)의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통해 만세시위 현장의 미디어를 분석한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가 3·1운동 관련 판결문을 분석해 선언서와 깃발, 노래 등의 사용 현황을 분석한 논문 ‘3·1운동 미디어의 상징체계’다. 이 연구는 국편과 동아일보가 27일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공동 주최하고, 일민미술관이 후원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 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서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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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대중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깃발을 주요 방식으로 선택한다. 대표적으로 1919년 4월 5일 충남 청양군 정산면 시장에서는 만세의 함성과 함께 태극기 10장을 뿌리며 독립시위가 시작됐다. 전남 강진군에서도 4월 4일 청년학생과 기독교인들이 독립선언서와 독립가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나눠 줬다.
1919년 3·1운동 당시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인 행렬. 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 초기에는 독립선언서가 주요 미디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대중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태극기, 애국가 등이 주요 미디어로 자리매김했다고 밝혔다. 동아일보DB
흥을 북돋는 노래도 대중을 이끈 주요 미디어였다.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에서는 악대의 연주에 맞춰 찬미가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했고, 3월 19일 경남 진주군 진주면에서는 북과 나팔을 앞세우고, 만세 행진을 했다. 3·1운동이 전국 각지로 퍼진 4월 초순(1∼10일)에 발생한 사건을 다룬 판결문 94건에는 노래 등 음성이 주도한 시위가 절반 이상인 49건에 이른다.
이 교수는 “3·1운동을 계기로 태극기가 민족의 저항과 독립의 상징이라는 성격이 확고해졌다”며 “당시 사용된 미디어인 깃발과 선언문, 격문, 현수막, 노래가 자리 잡으면서 근대적인 정치 투쟁으로서 ‘시위’라는 방법이 대중에게 자연스레 각인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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