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남달라 파이팅” “날아라 덤보” LPGA 뒤흔드는 떼창 응원

입력 | 2019-02-22 03:00:00

그린 새 풍경, 열정 가득 ‘한국 팬덤’




박성현과 그의 팬클럽 회원들이 21일 태국 촌부리 시암CC 올드코스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혼다 타일랜드 1라운드가 끝난 뒤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성현의 팬들은 검은색 모자와 옷 등을 맞춰 입고 응원을 펼친다. 박성현 제공

‘검은 물결’이 박성현(26)을 따라 움직인다. 이번에는 ‘노란 물결’이 전인지(25)를 뒤따른다.

검은 모자와 검은 옷, 노란 모자와 노란 옷을 입은 사람들의 물결이다. 검은색을 좋아하는 박성현, 노란색을 좋아하는 전인지를 응원하기 위해서다. ‘이글’을 기원하는 독수리, ‘미친 존재감’ 등 강렬한 그림과 문구도 등장한다. 일사불란하다. 박성현 팬들은 티샷 20분 전, 전인지 팬들은 10분 전까지 1번홀 티 박스 근처로 집결한다. 선수 소개 때 팬 중의 한 명이 박성현의 별명 ‘남달라’를 선창하면 기다리고 있던 수백 명의 다른 팬이 일제히 ‘파이팅’을 외친다. 통일된 응원복과 단합된 구호. 이런 풍경에 외국인 선수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박성현의 별명 ‘남달라’가 영어로 표기된 박성현 팬클럽의 검은 모자(왼쪽 사진)와 전인지의 별명 ‘덤보’가 적힌 전인지 팬클럽의 챙이 노란 모자. 박성현·전인지 팬클럽 제공

○ 외국인을 놀라게 하는 한국의 응원 문화

지난해 10월 인천 송도 잭니클라우스 골프클럽에서 열린 국가대항전 UL인터내셔널 크라운에 참가했던 대만의 스타 골퍼 캔디 쿵(38)은 미국 골프채널과의 인터뷰에서 “17년간 투어 생활을 하면서 한국 팬들처럼 대규모 응원을 펼치는 것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홍보대행을 담당하는 골프뉴스 에이전시 JNA의 최민석 팀장(45)은 “미국 팬들은 자신의 거주 지역에서 열리는 대회를 찾아 개인적으로 선수를 응원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눈에는 원정 응원을 펼치는 한국 팬클럽의 규모와 통일성이 신기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LPGA 홈페이지도 1월 한국 여자 골프 팬클럽 문화를 조명했다. LPGA는 UL 인터내셔널 크라운 때 경기장을 가득 메운 한국 팬들의 영상을 게재했다. 그러면서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은 혼신을 다해 에너지가 넘치는 응원을 펼치는 팬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의 응원은 미국프로골프(PGA)투어나 메이저 대회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다”고 전했다.

○ 팬클럽에서는 무슨 일이


온라인 팬카페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팬덤을 가진 대표적 선수가 전인지와 박성현이다. 2013년 개설된 전인지의 네이버 팬카페(플라잉 덤보)는 21일 현재 가입자가 1만254명이다. 2015년 개설된 박성현의 네이버 팬카페(남달라) 회원은 8281명이다.

짧은 머리에 바지를 입고, 호쾌한 장타를 날리는 ‘걸크러시’ 박성현의 팬들은 여성의 비율이 높다. 박성현 팬카페 부매니저 정태연 씨(47)는 “카페 활동을 하는 팬 중 여성의 비율이 89.3%다. 특히 45∼54세 여성의 비중(46.1%)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직업군은 다양하지만 평일 팬클럽 모임 시 주부와 직장인의 비율이 7 대 3 정도”라고 덧붙였다. 박성현의 팬인 민혜진 씨(47·여)는 “40, 50대 주부는 아이들을 어느 정도 다 키운 상태다. 이때 다른 일을 배우거나 관심사가 생기지 않으면 우울증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멋진 샷과 당당한 모습의 박 프로를 알게 됐고, 선수에 대한 대화를 팬들끼리 나누면서 친구도 생겼다”고 말했다.

전인지의 팬들은 노란색 모자를 쓰고 경기장을 찾아 응원을 한다. 사진은 전인지가 2015년 국내 대회에 참가했을 때 자신의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모습. 전인지 팬클럽 제공

반면 전인지 팬클럽에는 남성이 많다. 전인지의 팬카페 매니저 김은정 씨(47·여)는 “전인지의 여성스럽고 상냥한 모습, 홀을 지나며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등 친절한 팬 서비스에 매료된 중년 남성 팬이 많다. 팬카페 회원들의 성별을 살펴보면 남성이 80% 정도다. 일부 남성 팬들은 ‘내게 아들이 있다면 전 선수 같은 사람을 며느리로 삼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팬들은 시즌 중에는 경기장을 찾아 ‘직관(직접 관전)’을 하며 현장 응원을 한다. 박성현의 팬클럽 관계자는 “국내에서 열리는 대회에 박성현 선수가 오면 1라운드 혹은 4라운드가 끝난 뒤 팬카페 회원들과 식사를 함께한다. 이때 회원 500명 정도가 참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비시즌에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서울, 경인 지역 등 지역별 스크린 골프 모임을 열어 즐기고 응원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국내에서는 전인지의 별명인 ‘덤보’와 ‘파이팅!’을 외쳤던 전인지 팬들은 해외에선 ‘고(GO), 인지’를 외치기로 했다. “해외에서는 ‘파이팅’이 ‘싸우자’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한 명이 ‘고’를 선창하면 나머지가 ‘인지’를 외치기로 했다”는 것이 김 매니저의 설명이다. 박성현 팬클럽은 박성현의 올해 목표 승수에 맞춰 “5승 가자”를 응원 구호 중 하나로 사용할 예정이다. 해외 응원에는 평균 20∼30명이 참가한다. 카페 운영진이 대회 개최 지역의 교통과 숙박 정보 등을 올리면 자율적으로 응원에 참가한다. 해외 직관을 하는 회원들이 카페 내 응원방에 현장 소식을 올리면 밤새도록 1만 개가 훌쩍 넘는 댓글이 달린다.

○ 골프 에티켓 vs 응원 문화, 그리고 책임

일각에서는 한국의 열성적 골프 응원 문화에 우려의 시선을 나타내기도 한다. LPGA투어에서 활약하는 한 외국인 선수는 미국 골프채널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팬들은 꽤 큰 소리를 낸다. 휴대전화를 만지거나 벨소리가 울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국 팬들의 응원이 집중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팬클럽 회원들도 에티켓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노 폰(NO PHONE) 캠페인’이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해놓거나 꺼놓고 있는 것이다. 선수와의 스킨십을 자제해 달라는 내용도 있다. 여성 회원들이 스스럼없이 선수와 팔짱을 끼거나 하는 경우가 있는데 반드시 선수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해달라는 내용이다.

팬클럽 회원들은 선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박성현 팬클럽 회원들은 ‘울프(우리프로)’, 전인지 팬클럽 회원들은 ‘우리 선수’ 등으로 부른다. 팬클럽 내에서 회원 자신을 지칭하는 닉네임에는 ‘박성현’ ‘남달라’, ‘전인지’ ‘덤보’ 등을 쓸 수 없다. 선수를 사칭하는 글이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선수를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자긍심 높은 팬클럽이지만 경기장에서 잘못된 행동을 할 경우에는 금방 선수에게 해를 입힐 수 있다. 잘못된 행동은 플레이에 지장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선수의 명예와도 직결된다. 김 매니저는 “잘못된 행동을 하면 누구의 팬인지 곧바로 알 수 있기 때문에 회칙 등을 통해 매너를 더 엄격하게 지킬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주·고양=정윤철 기자 trigg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