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변호 맡았던 日후세씨 손자 인터뷰
고 후세 다쓰지 씨(점선 원)가 생전에 변호를 맡았던 독립운동가 박열(왼쪽)과 함께 있다. 오이시 스스무 제공
오이시 스스무 씨
후세 씨는 1923년 동아일보 후원으로 조선을 찾아 독립 강연회를 여러 차례 다니기도 했다. 같은 해 간토(關東)대지진이 발생했을 때는 일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 “정중히 사과를 드리며 책임을 통감한다”는 내용의 글을 동아일보에 남겼다. 1925년 여름 서울에 수해가 발생했을 때는 앞장서서 성금을 모으기도 했다.
오이시 씨는 “외할아버지가 가장 또렷하게 기억했던 변호인”이라며 편지 한 통을 보여줬다. 1925년 1월 18일 날짜가 기록된 3장짜리 문건은 후세 씨가 의열단원이던 독립운동가 추강(秋岡) 김지섭의 동생 김희섭에게 보낸 친필 편지다. 김지섭은 간토대지진 당시 일본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복수로 1924년 1월 5일 도쿄 일왕 궁성을 향해 폭탄 3개를 던졌다. 김희섭은 당시 변호인에게 형의 재판에 대해 문의했고 후세 씨는 자필로 친절하게 답했다. “김 군의 투옥은 오늘도 투쟁의 정신으로 부단히 전쟁을 계속 이어나가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후세 씨는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김 군의 마음을 이해한다”며 “이제 평소처럼 식사를 하고 건강도 회복했다”며 동생을 안심시키기도 했다. 김지섭은 1928년 2월 20일 뇌일혈로 지바(千葉) 형무소 독방에서 순국했다.
후세 씨가 현재 한국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오이시 씨는 “눈부시게 성장한 한국을 기뻐하며 축복하지만 한편으로는 둘로 갈라진 한반도의 상황과 북한 주민의 인권 유린 등에 안타까워할 것”이라며 “외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남북 통일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이시 씨는 냉랭한 한일 관계에 대해서도 “한국의 과도한 반일(反日)주의를 이용하려는 일본인이 적지 않다. 안타깝다”며 “냉정한 정치력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오이시 씨는 ‘바르고 약한 자를 위해 더 큰 힘을 다하라’라는 말이 외할아버지의 신념이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