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일신여학교(이하 일신여학교)의 후신인 동래여고(부산 금정구 소재) 교정에 있는 기념비에 적힌 비문이다. 여기에 ‘이러한 서울 소식’은 3·1만세운동을 뜻한다.
서울 시내를 휩쓴 독립운동 열기는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에도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장거리 이동수단이 변변찮았던 100년 전, 부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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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거름이 된 ‘여성교육의 힘’
100년 전 여성의 외부 활동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가장 먼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해답을 찾기 위해 21일 동구 좌천동에 있는 일신여학교 기념관을 찾았다. 부산 도시철도 1호선 좌천역 3번 출구를 나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니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이 나타났다. 1895년 호주장로교선교회 소속 여성 선교사들이 세운 일신여학교의 교사(校舍·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55호)로 오랫동안 사용됐던 곳이자 1919년 만세시위의 출발점이었다.
● 민족의식 일깨운 여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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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만세시위에 적극 참가했다 체포돼 징역 5개월을 선고받은 김반수(당시 16세·2001년 사망)는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생전에 이렇게 증언했다. “10일 밤 10시경 독립운동의 벅찬 감격에 가슴 두근거리며 주경애 선생의 기숙사 방에 모였다.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전기불을 끈 뒤 벽장 속에 들어가 이불로 창을 가리고 교대로 망을 보며 촛불을 밝혀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태극기를 만든 옷감은 (내) 혼수용으로 부모님일 마련했던 옥양목 한 필이었으나 부족해 마을 포목점에서 구입해 마련했다. 태극의 동그라미는 사발을 뒤집어 그리고, 깃대는 학교 대나무밭에서 구해 100여 개(일본 측 기록은 50개)의 태극기를 준비했다.”(동래학원 100년사)
당시 주경애와 박시연 교사는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학생들은 그런 선생님들을 잘 따랐다. 1917년 졸업 후 모교인 일신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한 박시연은 재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교무실에 걸린 일왕의 사진을 손으로 긁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만들었을 정도로 반일정신이 강했다.
두 교사에 앞서 일신여학교에는 평양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서매물이라는 여교사가 재직했는데 그는 항일 비밀여성단체 ‘송죽회’의 부산지역 조직책임자였다. 송죽회는 1913년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와 학생들로 구성된 항일 단체로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 활동을 주로 했다. 오미일 교수는 “서매물은 송죽회가 결성되기 이전부터 일신여학교에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며 “일신여학교의 반일적 분위기와 민족교육이 만세시위 운동의 자양분이 됐다”고 평가했다.
● 좌천동 큰길에 울려 퍼진 만세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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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길에 집결한 학생들은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시위 참가 학생 이명시와 박정수를 인터뷰한 책 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에 따르면 데이비스 교장(Margaret Sandiman Davies·한국명 代瑪嘉禮·1887~1963)과 다른 호주인 교사도 나와 만세를 부르며 학생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학생 송명진은 훗날 데이비스 교장 등이 자신을 잡으러 오는 것이 더 겁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제 관헌 자료에도 데이비스 교장과 데이지 호킹이 만세시위 때 “부르시오. 만세를 부르시오”라고 소리 높이 외치면서 학생들을 지휘했고, 학생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곧이어 주민들이 호응하면서 시위대 수는 100명 이상(‘조국을 찾기까지’에는 300~400명의 군중으로 나온다)으로 불어났다. 이후 학생들은 큰길에서 범일동 방면으로 방향을 바꿔 행진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일제 군경은 총검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며 진압에 나섰다. 이에 학생들은 반대 방향인 초량 방면으로 도망가려 했으나 그쪽에서도 군경이 나타나 인근 민가로 들어가 숨어야만 했다. 김반수는 “일제 군경의 총검에 길바닥이 삽시간에 피로 적셔졌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당초 시위대의 계획은 부산상업학교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11일 새벽 기숙사 주변에 만세운동 촉구 전단이 뿌려졌다. 한 학생이 주워온 전단을 건네받은 주경애 교사는 “이 삐라(전단)는 중앙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라는 삐라이니 비밀을 지키고 있으라”며 “오늘 저녁 9시에 부산상업학교 학생들과 부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위 움직임을 탐지한 경찰과 부산상업학교가 11일 돌연 시험을 중지하고 임시휴업을 단행한 뒤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그 결과 총궐기는 무산되고 일신여학교 단독 만세시위만 진행됐다.
● 체포된 뒤에도 당당했던 여학생들
이후 일경은 주모자를 자백하라며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뺨을 때리거나 구두발로 차고, 옷을 벌거벗기기도 했다. 어린 여학생들에겐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주동 인물은 없으며 우리가 모두 주동 인물”이라고 맞섰다. 특히 고등과 4학년 김응수는 “세 살 먹은 아이도 제 밥을 빼앗으면 달라고 운다. 우리들이 우리나라를 돌려달라고 시위하는데 무엇이 나쁘냐”고 따져 물어 심문하는 일경을 아연케 했다. 김응수는 1971년 일신여학교 시위 참가자 좌담에서 “당시 일경이 자신을 기절하도록 때렸다”고 공개하기도 했다.
심문이 끝난 뒤 부산형무소 감방 3곳에 나뉘어 수감됐다. 주경애와 박시연 교사는 징역 1년 6개월을, 학생들은 징역 5개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들은 옥중에서 모시실을 무릎에 비벼 뽑는 강제노동으로 무릎이 벗겨져 피가 나는 등 혹독한 수형 생활을 겪었다.
학생들이 먼저 석방됐으나 주경애·박시연 교사가 출소한 뒤 졸업식을 하기로 나머지 학생들이 결의했다. 결국 1920년 봄 8회 졸업식을 먼저 한 뒤 7회 졸업식은 교사들의 출소 뒤에 열렸다(동래학원 100년사).
부산=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