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비핵화를 위한 북미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졌던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열린 한 비공개 국제회의에 참가한 중국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가 이렇게 이야기하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채텀하우스 룰(누가 말했는지를 대외에 공개할 수 없음)’에 따라 진행된 이날 회의에서 그는 사실상 ‘북한 비핵화는 물 건너갔다. 왜? 중국이 돕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당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무역문제로 중국을 강하게 압박하며 양국 간에 관세장벽을 세우는 무역전쟁이 정점에 이를 때였습니다. 이 전문가는 중국이 사실상 북한 비핵화 문제를 미중 경제전쟁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공개한 것입니다. 그는 이런 이유도 덧붙였습니다.
“비핵화에는 시간이 걸린다. 제재도 해야지만 보상도 해야 한다. 미국이 북한을 비핵화 하려면 다자적인 협력을 통한 인센티브 패키지가 필요하다. 선거에 따라 정권이 바뀌고 의회의 비준을 받아야 하는 미국은 경제지원을 크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이 지원하지 않으면 북한이 안심하지 못할 것이다. 트럼프는 중국은 경제전쟁에 몰아넣으면서 북한에 대해서도 보상은 없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폐쇄(CVID)만 외치고 있다. 말로는 김정은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김정은은 믿지 않을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7일 다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자 미국 내에서 다시 ‘중국 배후론’이 나오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적 맥락 위에 있습니다. 지난해 하반기 비핵화 협상이 교착 국면에 빠졌을 때 북한의 비핵화 협상 조건을 중국이 좌우하며 협상 타결을 어렵게 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제기한 일종의 음모론입니다. 실제로 시 주석은 지난해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 전인 5월 7~8일 김 위원장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여 두 번째 북중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이어 회담 후인 6월 19~20일 다시 김 위원장을 다롄에서 만났고 이후 북미 비핵화 협상은 교착 국면으로 들어섰습니다.
북한으로서는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 조건을 후견국인 중국과 사전 협의하고 만일의 경우에 협력을 다짐하는 절차가 필요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도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자신들의 국익을 벗어하는 내용들이 결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전 스크린을 하는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상 6개월 만에 다시 시작되는 북미 비핵화 협상 2라운드의 팡파레가 북중 정상회담으로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국제사회는 ‘중국이 과연 북한 비핵화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회의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추궈훙(邱國洪·사진) 주한 중국대사는 지난해 11월 26일 본사 부설 화정평화재단·21세기 평화연구소가 주최한 국가대전략강좌에 연사로 나와 비핵화 협상에서 북한을 중국이 조종한다는 이른바 ‘중국 배후론’에 대해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중국은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낼 능력이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소개한 전문가의 발언이나 지난해 하반기 북중 밀월과 비핵화 교착 상태의 경험을 보면 중국은 북한 비핵화라는 국제사회 공동의 목표보다 북한 문제를 지렛대로 자신의 국익을 지키려는 행태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북한 비핵화의 주요 당사자인 북한 미국 한국의 능력(capability) 한계 때문에 완전한 비핵화가 쉽지 않다고 말해 왔습니다. 북한의 경우 비핵화에 따른 개방과 개혁을 하고도 체제를 유지할 능력(수용능력), 미국의 경우 북한이 숨겨놓은 핵 능력을 탐지해 협상을 통해 제거할 능력(탐지능력), 한국의 경우 비핵화의 대가로 대규모 경제 지원을 할 수 있는 능력(지불 능력)에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중국이 자기의 국가이익을 일부 양보하고서라도 북한 비핵화를 위해 국제사회와 협조하는 능력입니다. 이걸 양보 능력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 역시 쉽지 않아 보입니다. 네 번째 당사자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러 명의 사냥꾼(북한 비핵화의 당사국)들이 산중의 사슴(북한 비핵화)을 함께 잡기 위해 산을 포위하고 몰이를 하지만 한 사냥꾼(중국)이 옆으로 지나가는 작은 토끼(북한을 동맹국을 붙들어 놓을 때 오는 이익)를 잡으려 대오를 이탈하기 때문에 사슴은 유유히 도망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관계에서는 ‘소탐대실’하는 이 사냥꾼을 비난할 수 있겠지만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서는 그것이 세계정부가 없는 무정부적 국제체계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일, 그러니까 행위자의 합리적 선택을 유도하는 구조의 문제로 칩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